[2011 SERI CEO 추천도서] 전(傳)을 범하다
지금껏 한 번이라도 옛 소설을 범한 적이 있는가
각종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압도하는 시대, 킨들로 문학을 읽고 아이폰으로 영화를 만드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옛 소설의 현대적 변주는 멈추지 않는다. 고전이야말로 오랜 세월을 버텨온 ‘스토리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옛 소설에 매혹당했다’고 자처하는 국문학자이자 ‘서사 여행자’인 이정원은 13편의 우리 고전소설을 ‘권선징악’이라는 굴레에서 해방시켜 욕망과 위선, 폭력과 일탈로 가득한 진짜 속내를 들추어냈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처럼, 저자는 계몽 근대가 주입한 고지식한 해석과 그를 고착시킨 우리 문학 교육에 반박하며 “과연 한 번이라도 우리 옛 소설을 제대로 감상해본 적이 있는가” 묻는다. 그는 “새로운 스토리 찾기에 혈안이 된 전 세계의 문화 산업계는 앞다투어 동ㆍ서양의 고전을 파헤치는데, 정작 국내 독자들이 수백 년 변모해온 우리 고전소설의 잔혹하고 서글픈, 발칙하고 유쾌한 속내를 들여다보지 못해 아쉬웠다”며 집필의 동기를 설명한다.
《전을 범하다》에서 저자는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과 같이 익히 유명한 고전소설에서부터 <김원전>, <김현감호>, <황새결송>처럼 상대적으로 낯선 고전소설까지 폭넓게 넘나든다. 익숙한 전(傳)의 재해석에선 기존 문법과 가치관을 뒤흔드는 통쾌함을, 생경한 작품의 재해석에선 신선한 고전의 매력을 맛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폭력적인’ 고전 읽기를 거부할 때 - 장화의 계모를 위로하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고전소설들은 신기하게도 모든 주제가 ‘권선징악’과 ‘충효열 사상’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모든 고전소설의 주제가 ‘권선징악’이라는 그 폭력적 시각은 어디서 왔을까. 저자는 이러한 시각을 근대라는 ‘계몽’이 붙여놓은 일종의 ‘스티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이 스티커를 떼어버리고 나면, 수많은 전(傳)에 농축된 인간의 본능과 욕망,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보인다.
이를 테면, 실제 살인사건을 토대로 지어진 <장화홍련전> 속에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물의 사연이 있다. 익히 ‘악독한 계모와 불쌍한 본처 자식’의 구도로만 읽힌 <장화홍련전>을 조선 후기 가부장제의 폭압 속에서 읽게 되면 우리는 징벌 당한 악의 현신 ‘계모’가 아닌, 철저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불쌍하고 힘없는 ‘후처’들을 만나게 된다. 정작 살인을 방조한 ‘진범’ 아버지는 ‘사악한 계모’라는 장치의 뒤꽁무니에 숨어버린다.
이처럼 그간 침묵했던 장화의 계모를 다시 이해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우리 옛이야기들을, 독자들에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박제된 고전(古傳)’이란 오명에서 구하는 일이 된다. 동시에 고전에 대한 새로운 독법은 옛 이야기가 갖는 무궁무진한 스토리텔링의 힘을 발견하게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모여 전(傳)은 비로소 ‘한국적 서사의 원형’이자 ‘스토리 전쟁터’로서 원래의 지위를 되찾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탄생했다.
살해당한 심청에서 ‘숫맛’ 아는 까투리 부인까지
<심청전>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작품이지만, ‘효’ 이데올로기를 벗어버린 이 잔혹한 소설의 실체에 대해서 생각해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심청전>에서 ‘살인’을 발견하는 저자의 시각은 자못 공격적이다. ‘거룩한 도덕 교과서’ 혹은 ‘효의 상징’이라 칭송받는 이 작품의 본질은 마을 사람들과 심 봉사가 공모한 ‘심청 살인 사건’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또한 부인 까투리가 먹지 말라던 콩을 주워 먹고 끝내 비명횡사한 남편 장끼의 이야기, <장끼전>은 저자에 의해 ‘어미의 사생활’이 담긴 은밀한 서사로 재탄생했다. 시선의 초점은 무능한 장끼의 죽음 이후에 맞춰진다. 미망인이 된 까투리 앞에 까마귀에서 기러기까지 ‘난다’하는 남정네 새들이 줄지어 청혼을 한다. 이본에 따라 청혼을 거절하기도 하고, 자결을 하기도 하지만 규방가사로도 전해진 이 작품의 구활자본에서 까투리는 또 다른 ‘홀아비 장끼’를 선택한다. 대체 그녀는 왜 나이 어린 부엉이와 돈 많은 오리를 거절하고 재차 장끼를 선택한 것일까.
저자는 이 소설을 고소설 중 유일하게 ‘어머니의 욕망’을 등장시킨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녀는 ‘숫맛’을 알고, 그 재미를 살림의 재미로 뭉쳐내는 건강한 어머니다. 수많은 고전소설에서 반복된 못된 계모나 첩이거나, 혹은 남성 영웅의 전리품쯤으로 각인된 여성이 아니다. 이렇듯 <장끼전>에도 정제되지 않은 욕망과 삶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담겨 있다.
옛 소설에 숨겨진 ‘롤리타 콤플렉스’와 재판 승소의 ‘레시피(recipe)’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문학작품들은 현대가 마주한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때로 우리는 아주 오래된 작품 속에서 지금을 발견하기도 하고, 삶의 본질적인 프레임을 찾기도 한다. 《전을 범하다》가 소개한 13편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소녀시대’라는 걸 그룹에 열광하는 ‘삼촌팬’들은 고전소설 <최낭전> 속 욕망의 현시(顯示)일지 모른다.
그리 유명한 작품은 아니지만 저자는 ‘못다 한 이야기’ 페이지를 통해 짧게나마 <최낭전>을 소개한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홀어미와 의지하며 살던 어여쁜 최낭이라는 소녀가 우여곡절 끝에 이여택이라는 고을 태수의 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최낭은 결국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경주 지방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초혼사’를 지었는데, 결국 이 서사에서 독자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사대부 남성의 이기적 시선이다. 노비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13세 최낭은 늙은 사대부의 첩으로 팔려갔지만 결국 그녀는 ‘롤리타 컴플렉스’의 희생양이 된 셈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현대 한국 사회의 병폐를 되짚어 보게 하는 작품에는 <황새결송>도 있다. 반복되는 사법부 비리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짜릿한 진실에 파헤치는 송사소설들은 당시에도 인기가 제법 있었다고 한다. 송사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황새결송>은 ‘황새가 송사를 마무리 짓다〔結訟〕’란 뜻의 제목인데 묘하게도 ‘공정한 사회’라는 최근의 슬로건, 그리고 그와 상반된 우리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돈 많고 ‘교제력’ 좋은 친척이 결국 정직하고 순진한 부자를 이겼다는 이 소설의 결말은 씁쓸하다.
결국 <황새결송>에서 발견하는 재판에 이기는 비법은 진실이나 정의 따위가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분주하게 ‘교제’하고 재판관의 사돈 선물까지 챙겨 넣는 ‘작전’에 있다. 사법 비리가 거대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이라는 뇌물과 사소한 선물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이 소설의 인식에서 저자는 오늘날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라는 슬로건이 갖는 슬픈 역사성(?)을 발견하고 있다.
고전을 ‘다시 읽고, 뒤집어 까는’ 통쾌함
시절이 흉흉하다. 아침저녁으로 포털 사이트의 메인은 아버지가 친딸을 성폭행하고, 아들뻘의 제자와 여교사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믿지 못할 뉴스들로 채워진다. 많은 이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탐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런데 박제된 고전들에 ‘과감한 하이킥’을 날리다 보면,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제되지 않은 비슷한 스토리들과 만나게 된다. 그 속에는 눈을 뜨기 위해 딸을 바다에 내던진 아비가 있고, 한때의 욕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젊은 청춘들과 잇속 계산에 바쁜 기생의 어미가 있으며, 별주부 부인을 탐하는 토끼도 있고, ‘영웅’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당돌하고 철없는 도사도 있다.
우리 고전소설을 다시 읽는 시도는 결국 인간의 적나라하고도 깊숙이 자리한 욕망과 마주하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점잖게만 읽어왔던 우리 옛 소설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실상 다르지 않은 현대인의 모순과 탐욕, 정치와 폭력을 생생하게 재발견하는 경험 말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느낄 통쾌하고 짜릿한 기분이야말로 이 책 《전을 범하다》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삶이 헛헛할 때 우리에겐 아직 <장화홍련전>이, <김원전>이, <토끼전>이 있기에 또 한 번 뼈저리게 깨닫고 통쾌하게 웃어넘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