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어디 가?
죽은 아내의 유품이 한 남자를 ‘묵은 사랑’에 눈뜨게 하다
아내를 떠나보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아내 생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상자 속에는 자신이 결혼 초부터 아내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들과 아내에게 건네주었던 월급봉투들이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편지들을 하나하나 꺼내 읽어보던 남자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펑펑 울고 말았다. 편지 속에는 남자가 아내와 함께해왔던 평생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먼저 떠나간 아내가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 힘이 남자로 하여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펜을 잡게 만들었다.
가족 해체가 만연한 시대에 부부간의 사랑을 일깨워주는 글
평생을 자동차산업에 종사해온 저자는 글쓰기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저 일생을 직장과 사업에 바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펜을 잡고 글을 써내려갔다. 오직 아내와의 삶을 추억하기 위해서. 저자가 글을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물론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내가 소중히 간직해온 편지들이 가슴 속 깊이 숨겨뒀던 부부간의 사랑에 불꽃을 붙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편지에는 결혼 초반 젊은 혈기에 아내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자신의 치부임에도 저자는 그것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밝힌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편 하나만 보고 온 시집살이와 줄줄이 딸린 시누이, 시동생들 속에서 항상 곤궁하기만 했던 살림, 그런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겉돌기만 하는 남편. 그런 속에서 악착같이 살림을 하며 남편을 묵묵히 보필해주던 아내의 마음고생은 그대로 병으로 남았다.
그간 아내가 감내해왔을 수많은 간난신고를 두 눈으로 지켜봐왔던 남자는 뒤늦게 병든 아내의 병수발을 들기 시작한다. 직접 아내의 머리를 감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새삼스레 아내에 대한 사랑을 키우며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다.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를 출근할 때 직장까지 데리고 다니는 남자의 모습은 눈물겹다. 이런 두 사람을 통해 우리는 부부란 서로가 부족하고 모자랄 때 채워주는 관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편지로 아내를, 삶을 추억하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한 결혼에, 신혼 초에는 상황이 여의치 못해 떨어져 산 부부에게 이렇게 깊은 정이 쌓일 수 있었던 것은 수없이 주고받으며 켜켜이 애정을 쌓을 수 있게 해준 편지들 덕분이 아닐까.
남자는 편지를 통해 아내에게 소소한 하루 일과를 그대로 적어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아내에게서 답장이 자주 오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책에는 남자가 아내에게 쓴 편지만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내는 남편이 보낸 편지를 모두 보관해놨으나 남자는 아내가 답장으로 보낸 편지들을 간수하지 못한 탓이다. 남자는 또한 그것이 못내 미안하다.
통신수단의 발달로 사람들 사이에 서로 연락하는 횟수는 더 많아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으로 직접 쓴 편지에 대한 그리움이 여전한 것은 왜일까.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와 감정들이 정성을 통해 형태를 갖추고, 그것이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던 감성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부간에 주고받은 것이라면 더욱 더 애틋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점차 사라져가는 한국 서간체 문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급변해온 현대사에서 오롯이 남아있는 보통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글
이 책 곳곳에는 남자가 아내뿐만 아니라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급변해온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겪게 되는 소시민들의 꾸밈없는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만나게 된다. 산업화 초기의 곤궁했던 생활상과 88서울올림픽과 같은 국가적인 경사는 물론 5?18광주민중항쟁, 격심했던 노사분쟁 당시의 처참했던 순간들은 개인과 가족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남자도 광주민중항쟁의 여파로 일터를 감시당하기도 하고, 노조에 가입한 동료를 관리해야 하는가 하면, 아내와 자주 가던 낚시터가 지역 개발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섭섭해 하기도 한다. 이렇게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시대의 흐름과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이 서로 연계되어 녹아있는 상황을 읽는 재미도 이 책의 커다란 장점 중 하나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큰 사건이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찌 보면 거꾸로 저자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들이 모여서 커다란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만화가 강풀 원작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만화를 통해 한때 어르신들의 사랑이야기가 주목을 받은 적이 있는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특정 연령대에 국한될 일이 아니다. 노년층 역시도 한때는 우리와 같은 청춘이었다. 어르신들이 ‘사랑을 했고, 사랑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르신’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책 역시 과거에도 아내를 사랑했고, 지금도 아내를 그리워하는 평범한 한 사람의 따뜻하고 애틋한 기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