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란 무엇인가
데뷔 이십 주년을 맞이한 소설가 김경욱이 묻는다.
당신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야구란 무엇인가? 혹시라도 당신이 야구팬이라면 이러한 질문을 받아들고 나름의 대답을 하기 이전에 먼저 야구의 고전 『야구란 무엇인가(New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스포츠 전문기자로 활약한 레너드 코페트가 저술한 야구인들의 필독서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아마 다음과 같은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다름아닌 “무서움”이라는 화두로 시작된다는 것. 야구란 바로 무서움을 다루는 경기이며 이를 간과한다면 야구에 대해 결코 어떤 이야기도 전개해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 말이다.
이제 각도를 달리한 그러나 결코 대상을 우회하지 않는 ‘소설적 질문’을 던져보자. 야구란 무엇인가? 아마 이는 레너드 코페트가 던지고 답했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소설가에 의해 소설로써 던져진 질문이므로. 1993년 스물세 살에 데뷔한 이래로 무서운 집념과 성실함으로 소설을 써오며 “소설기계”(문학평론가 서영채)라는, 일찍이 그 누구에게도 붙여진 적이 없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김경욱. 2013년 올해로 데뷔 이십 주년을 맞이한 그가 여섯번째 장편소설을 통해 이렇게 묻는다. 당신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너희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봐.
주사위를 던져서 홀수면 빨갱이고 짝수면 아니야.
제목과 달리 『야구란 무엇인가』는 본격적으로 야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일종의 복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광주가 고향인 사내에게는 삼십 년 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동생이 있다.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하고 있던 그날의 광주, 그저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가 한 무리의 군인들에게 걸려든 형제. 군인 중 하나였던 ‘염소’는 형제에게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보라며 동생의 주머니에서 나온 주사위를 내민다.
선택의 여지는 없으므로 사내의 동생은 주사위를 던질 뿐이다. 이 주사위가 과연 형제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까? 동생은 주사위가 숫자를 내보이기 전에 입으로 삼켜버린다. 아마 유달리 영특했던 동생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목숨은 한낱 주사위가 아니라 악랄한 광기에 사로잡힌 군인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결국 동생은 그를 괘씸하게 여긴 군인들에게 가혹한 구타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숨지고 만다. 삼켰던 주사위를 항문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내보낸 채 말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한 가족의 삶을 파탄내기에 이른다. 아버지는 여생을 술로 탕진하다가 화병으로 죽는데, 억울함에 땅속에서조차 편히 눈감을 수 없다. 그는 사내에게 관을 눕히지 말고 똑바로 세워 달라고 당부한다. 사내는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채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또 그 미안한 마음을 가족들에게 전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통한을 평생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간다. 마침내 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삼십 년간 웅크린 채 지냈던 그는 아홉 살짜리 아들 진구를 데리고 복수를 하기 위해 서울의 ‘염소’를 찾아나선다.
아빠는 선발투수고 진구는 구원투수야.
아빠가 위기에 빠지면 진구가 아빠를 구원하는 거야.
그런데 이 부자가 조금 이상하다. 독자는 아마 다음 장면들로부터 이러한 서사가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부자는 광주에서 서울로 직행하여 ‘염소’를 찾아낸다. 사내는 ‘염소’에게 주사위를 내밀고 그가 동생에게 했던 그대로 그것을 던지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숫자가 나오든 ‘염소’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어쩌면 독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염소’ 역시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진실과 마주하고 사내와 함께 그를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이렇듯 조금은 익숙한 복수와 용서의 서사가 펼쳐지리라는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들의 행로는 그것과는 거리가 영 멀다. 노란색에 집착하고 남다른 기억력을 지닌 아이 진구는 아빠의 상황이 어떻든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먹어야겠다고 떼를 쓴다. 막무가내인 아들에게 사내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길 위에서 사내는 ‘염소’ 대신 치킨집을 찾아 헤맨다. 그뿐인가. 문득 군산에 있다는 아이의 엄마가 생각난 사내는 아이를 여관에 남겨둔 채 그녀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 얼마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마음으로 여관에 돌아온 사내는 이내 아이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대체 복수란 무엇인가? 사내는 과연 서울에 가서 ‘염소’를 만나기나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 집에 가자. 무사히, 살아서 집에 돌아가자.
그에 대한 답은 소설을 통해 확인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가자. 사내는 아들에게 언제나 가보자고만 이야기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렇게 해준 적이 없었던 야구장에 간다. 난생처음, 아들과 함께하는 나들이다. 그는 아들과 잠실경기장 관중석에 앉아 호랑이와 곰의 대결을 지켜본다. 또한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불운이 경기에 영향을 줄까봐 염려하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던 9회 말의 경기를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다.
그러니까 광주를 떠나 군산을 거쳐 서울로, 그곳에서 다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갈 내일을 생각하며 사내는 이런 사실을 깨닫지 않았을까. 야구란, 결국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경기라는 것. 거쳐야 할 베이스들을 하나씩 정확하게 밟아야지만 홈 플레이트로 들어올 수 있듯이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말이다. 사내는 아이와 함께 경기가 종료된 야구장, 모두 집으로 돌아가 텅 비어버린 그곳에서 캠핑을 하기로 결정한다.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온 사내와 비정상적인 능력으로 언제나 외롭게 지내온 아이는 이 순간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마음을 나눈다.
그간 김경욱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아마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치 못한 온기를 느끼며 조금 당황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온기에 제법 알맞게 데워진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선 베이스를 확인하고 홈으로 뛰어서 돌아갈 힘을 조금이나마 얻게 되리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