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
어찌 보면 발칙한 고전 읽기
두 명의 젊은 인문학자(오세정, 한양대 교수?조현우, 인천대 교수)가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을 ‘까칠하게’ 읽었다.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과 같은 ‘국민 고전’은 물론이고 〈이생규장전〉, 〈정수정전〉, 〈창세가〉 등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한 고전까지 모두 열두 편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소개한다. 저자는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고전 콘텐츠가 어떻게 활용되고 재탄생되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던 ‘판에 박힌’ 고전 해석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고전의 배경이 되었던 해묵은 이데올로기를 오늘날 관점에서 날카롭게 파헤친 사고의 전환이 신선하다. 쉬운 문체, 풍부한 이미지, 도발적 문제 제기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고, 고전에 대한 고정관념을 대번에 날려버리는 21세기형 고전읽기다.
고전은 인간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
〈옹고집전〉은 성격이 못된 옹고집을 혼내주려고 도승이 허수아비로 만든 가짜 옹고집을 보내고, 가짜 옹고집에게 쫓겨난 진짜 옹고집이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참회하여 착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 배경에 숨은 교훈은 ‘착하게 살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옹고집전〉을 전혀 다르게 읽는다. 요즘 예사롭지 않은 화두로 떠오르는 ‘사이보그, 복제인간’의 문제와 관련하여, 자아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질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치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나와 완벽하게 똑같이 복제된 인간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신체적 특성이나, 기억이나, 주위의 인정이나, DNA 검사조차도 나를 증명할 확고한 기준은 되지 못한다. 2005년 개봉한 영화 〈아일랜드〉에서 복제인간 링컨 6 에코가 원본 톰 링컨과 나란히 서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결국 가짜로 판명되어 죽임을 당한 쪽은 원본이었다. 이처럼 저자는 지금껏 권선징악의 코드로만 읽던 〈옹고집전〉을 통해 전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우리가 아는 고전 역시 그 의미가 달라지고, 우리에게 늘 현재의 삶과 사회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고전이 정말 귀중한 자산임을, 저자는 다양한 분석을 통해 확인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점검하다
효(孝)의 상징인 심청이. 정절(貞節)의 표상인 춘향이. 그리고 조선시대 수많은 열녀(烈女). 과연 오늘날 여성도 이들을 지표 삼아 효도하고, 정절을 지키며 수절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심청이를 죽인 범인으로 세 사람을 지목한다. 우선, 경제능력도 없이 덜컥 공양미 삼백 석을 내겠다고 약속한 심청의 아버지가 그 원흉이다. 그는 딸에게 얹혀살면서 목숨을 바치러 팔려가는 딸을 붙잡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는 딸을 죽음으로 내몰고 뺑덕어멈에게 새 장가까지 든 인물이 아니던가. 장사하는 뱃길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인간 희생도 서슴지 않았던 뱃사람들의 부도덕성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게다가 시각장애인 무직자 심학규에게 쌀 삼백 석을 내면 눈을 뜰 수 있다고 꼬드긴 화주승 역시 시쳇말로 치졸한 사기꾼과 다름없다. 그의 ‘사기’는 결국 착하고 어린 처녀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심청전〉을 읽고, 판소리를 들으면서 심청의 효성만 칭송할 것인가.
춘향은 왜 옥에 갇혔을까? 요즘으로 치자면 고위 관리 부잣집 ‘엄친아’를 만난 후줄근한 집안 출신 처녀 춘향이. 솔직히 그녀가 내세울 것은 미모밖에 없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한 이유는 일부종사하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그녀의 행동은 법에 어긋난다. 사또에게는 관기의 딸에게 수청을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 옥에 갇히는 것은 좀 안 된 일이긴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분명한 위법행위다. 〈춘향전〉에서 정작 악당은 이도령이다. 어린 처녀와 불장난을 하고,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 발령이 나자,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온다는 막연한 약속만 남긴 채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간다. 책임감 없이 여자를 희롱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전형적인 유형이다.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춘향을 옥에서 구했지만, 만약 일이 꼬여서 과거에 낙방했다면 춘향을 어찌할 셈이었을까?
그 밖에도 저자는 〈사씨남정기〉에 등장하는 악녀 교채란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정당했는지, 열녀문을 세워주고 수절을 장려한 열녀들의 삶은 과연 의미 있는 것이었는지, 여성이면서 남장을 하고 남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랐던 정수정의 시집살이는 과연 온당했는지, 신분이나 재능이 훨씬 뛰어났던 최랑이 죽어서까지 못 잊어 함께한 이생에 대한 사랑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고전에 등장하는 여성의 삶과 사랑과 욕망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진지한 분석을 펼친다.
영웅의 삶을 돌아보다
저자는 또한 우리나라 ‘창세신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집단의식을 조명한다. 태초에 세상이 열리면서 질서를 부여하고 인간을 창조한 미륵에게 도전한 석가. 그는 속임수를 써서 미륵과의 내기에서 이겨 세상을 차지한다. 또 다른 창세신화인 ‘목도령 이야기’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목도령을 배반한 ‘소년’이 결국 세상의 반을 차지한다. 우리 창세신화에서는 왜 이처럼 악하고 교활한 존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을까? 충신의 전범으로 불리는 유충렬은 과연 이름 그대로 충신이었을까? 신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분연히 항거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겠다고 율도국으로 떠난 홍길동은 평화롭게 살던 섬사람들을 학살하고 왕권을 찬탈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조선 조정에 여전히 ‘신하’의 예를 갖춘 홍길동은 과연 혁명가였을까, 아니면 여전히 본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통치자였을까?
저자는 그간 우리가 고전을 읽으면서 당연시했던 지배적 가치들에 거북한 이의를 제기한다. 이는 우리 고전이 다층(多層)의 독서가 가능한 훌륭한 문화 콘텐츠로서 늘 새롭게 태어날 잠재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결국, 고전의 생명력은 영원불변의 가치 보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다시 태어날 가능성에 있음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탄생하는 우리 고전
이 책의 흥미는 무엇보다도 고전 콘텐츠가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재탄생하거나, 유사한 내용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소개했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이생규장전〉을 통해 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던 영화 〈원스〉나 〈트와일라잇〉, 애니매이션 〈뱀파이어 헌터 D〉 등의 핵심을 짚어낸다. 또한, 고전 〈춘향전〉의 골격을 그대로 빌려온 수많은 TV드라마의 영원한 주제, ‘신데렐라 신드롬’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현상도 살펴본다. 그런가 하면, 〈심청전〉과 영화 〈에이리언〉을 통해 인문학자 르네 지라르의 희생제의 논의를 소개하는 등 깊이 있는 해석도 놓치지 않는다. 아울러 ‘주몽신화’의 분석은 꾸준히 이어지는 안방극장의 TV사극 열풍의 배경을 돌아보고, 〈스타워즈〉, 〈매트릭스〉, 〈언더월드〉, 〈나루토〉 등 대중문화 콘텐츠와의 연관성도 더듬어본다. 한마디로 고전을 축으로 삼아 대표적 대중문화 장르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저자의 기발한 상상력은 책을 읽는 내내 독자의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다. 특히, 대중문화 분야에서 서사를 연구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에게는 창의력을 북돋을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