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가게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삶을 유예시킨 아이들의 이야기
“이 시계가 하루에 십 분의 시간을 내 줄 거야. 시간을 사는 방법은 아주 쉬워. 돈은 필요 없다. 넌 행복한 기억을 하나씩 주면 돼. 어때, 나와 거래를 하겠니?”
지금 현실의 고통받는 아이들의 아픔에 접속하여 그들의 소망을 그들이 좋아하는 양식인 판타지로 그려 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참으로 각별하다. 그래서 우리 심사위원은 전원 일치로 『시간 가게』를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시간을 단순히 소재로 사용하지 않고 시간과 기억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이중적 사유를 통해 아이들을 위무하고, 정체성 형성의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_심사평 중에서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현실 아이들의 삶과 내면에 접속하는 생생한 판타지 동화
교훈주의를 뛰어넘은 역사 동화의 진수를 선보인 『책과 노니는 집』, 대담한 주제의식과 작법으로 어린이문학의 한 경계를 넘어섰다는 평을 받은 『거짓말 학교』, 작품의 배경을 프랑스로 확장하여 우리 사회의 남북문제를 짚은 『봉주르, 뚜르』, 로봇과 인간 아이의 우정을 그리며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시각을 담은 『열세 번째 아이』 등 선이 굵고 개성이 강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어린이문학의 깊이와 폭을 넓혀 온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이 또 한 번의 걸출한 수상작을 출간했다. 『시간 가게』는 입시라는 미래의 목표를 위해 ‘지금’의 삶을 유예시킨 이 시대의 초등학생들과 그 가족들의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아이들은 과연 이대로 행복한가?’라는 깊이 있는 질문을 건네는 작품이다.
경제 위기가 빚어낸 낙오에 대한 공포와 국제중, 일제고사 등의 등장은 우리의 불안으로 하여금 ‘동심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합의가 지키고 있던 마지노선을 무너트리고 초등학생까지 입시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제는 어린아이라고 해서 더 이상 예외가 아닌 경쟁의 딜레마 속에서 많은 초등학생들은 학원을 순회하며 자란다. 공부는 물론이거니와 취미나 여가도 학원이라는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며 규격화되고 후일의 목표를 위한 경력으로 준비된다. 가족의 풍경도 달라졌다. 부모가 마치 매니저처럼 자녀를 관리하고 입시 전략, 나아가 인생의 계획을 면밀히 세워주는 식이다. 『시간 가게』는 판타지적인 재미를 우선으로 하면서도 이런 현실을 재료로 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는 공부를 하며 늘 시간에 쫓기는 주인공 윤아는 어느 날 시간 가게를 만나 ‘기억을 팔아 시간을 사는’ 거래를 하게 된다. 그 뒤로 조금의 틈도 없이 꽉 짜여 있던 한 아이의 평범한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시간 가게』는 입시 광풍으로 온전한 자기를 잃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 낸다. 주인공은 오로지 1등이 되기 위해 매일 십 분의 시간을 사고,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린다. 이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마술적 장치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 아이들의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서사가 진행되며 아이들의 소망을 재미있게 그린 판타지인 것 같던 이 동화는 바로 이곳의 현실을 잡아당긴다._심사평 중에서
‘지금 쓸 수 있는 십 분’을 사기 위해서라면 과거의 행복한 기억쯤은 팔 수 있다는 윤아의 생각은, 단 십 분만이라도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 심리의 반증이면서 동시에 ‘장밋빛 미래를 위해서라면 현재 삶의 기쁨은 희생시켜도 아깝지 않다’라는 어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기초로 한 시기적절한 문제 제기, 그리고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품고 힘껏 뻗어나가는 서사의 독창성과 박진감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열심히 공부해야 미래가 편한 거야.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엔 웃게 돼.”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 이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엄마와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_본문 중에서
초등학교 5학년인 윤아는 엄마가 짜 놓은 계획표에 따라 하루 종일 학원을 다니고, 학습지를 풀고 인강을 듣는다. 전교 2등의 실력이지만 영어 학원 레벨 테스트를 잘 보기 위해 과외를 받고, 수학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도 또 수학 과외를 받아야 한다. 엄마는 먼저 세상을 뜬 아빠에게 떳떳하기 위해 윤아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밤낮없이 돈을 버느라 바쁘다. 매 순간이 벅차지만 윤아는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어 꾹 참으며 공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제시간에 늦어서 평소와는 다른 길로 학원에 가게 된 윤아는 운명처럼 ‘시간 가게’를 만난다. 길을 물어볼 곳이 필요하던 윤아는 대수롭지 않게 시간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다.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나무나 벽에 적힌 이상한 문자 등 시각을 압도하는 그 기이한 공간 안엔 마치 윤아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하루에 한 번, 행복한 기억을 하나 팔면 오직 나만 쓸 수 있는 십 분이 생기는 거래를 제안받는다면 어떨까? 늘 시간이 아쉬운 윤아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할아버지가 제시한 거래를 수락하고 특별한 시계를 받는다. 온 세상이 멈춘 십 분 동안 윤아는 자유롭다. 그리고 그 십 분들은 고스란히 1등이 되는 시간으로 사용된다. 시간이 멈춰 있는 동안 답안지를 베껴 라이벌인 수영이를 제치고 전교 1등이 되는 기쁨도 누린다. 시험 결과가 만족스러워질수록, 엄마의 웃는 모습이 늘어날수록 윤아의 마음은 불편해지지만 한번 시작한 시간 거래의 유혹은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이사 오면서 헤어졌던 친구 다현이와 외할머니 등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불안한 행복을 유지하던 윤아를 뒤돌아보게 한다. 상대방이 내보이는 따뜻한 감정에 진심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아빠와 공유했던 비밀들도 잃어버린 자신을 보며 윤아는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몰래 시간을 사는 것을 누군가가 알아챈 것 같아 큰일이다.
매력 없는 아이, 아무것도 아닌 나 이윤아. 나는 누구인가?
행복했던 기억이라……. 갑자기 떠올리려니 막막했다. 그런 건 시험문제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_본문 중에서
누군가와 맺었던, 온전히 느꼈던 행복한 기억을 잃어버리자 윤아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점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팔기 위해서 ‘행복’에 대해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동안 처음으로 진짜 바라는 것이 생긴다. 교육열이 센 동네로 이사 오고 난 뒤 친구 관계에 대한 기대감도 버리고 스스로의 느낌이나 의견 같은 건 애써 무시한 채 로봇처럼 일상을 수행하던 윤아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행복, 기억, 시간 같은 것의 소중함을 느낀 윤아는 이제는 추억이 갖고 싶다. 기억이 없는 나는, 가슴이 텅 비어 혼자인 나는 진짜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엄마 말처럼 미래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다 해도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_본문 중에서
윤아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더 이상 잃을 수가 없어 시간 가게로 달려간다. 조급해하는 윤아에게 시간 가게 할아버지는 이제까지와는 정반대의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는데……. 윤아는 과연 이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시간 가게와의 거래가 점점 교묘하고 복잡해질수록 서사의 흐름에도 속도감이 붙고 긴장감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간다.
멈춰진 아이들의 삶을 다시 재생시켜야 할 때
입시라는 과제 앞에 아이들의 소소한 삶의 경험은 저평가되기 십상이다. 바쁜 일상에 ‘놀이’나 ‘자아’나 ‘관계’가 들어올 자리는 없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경험들이 쌓여 유년기의 자아 정체성을 형성한다. 직접 부딪치고 체험하며 얻는 지혜,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설계하는 자아정체성과 세계관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어린이청소년문학평론가 유영진은 ‘정체성 형성이라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아이들은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어 간다’면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나를 채워 주는 그 무엇이 없는 텅 빈 아이가 자신과 자신의 미래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사라진 아이의 시간과 기억은 돌이킬 수 없기에 주인공이 기억을 사고자 하는 노력은 파국으로 빠져들어 갈 수 밖에 없다’고 짚는다. 이런 상황은 비단 작품 속에서의 문제만이 아닌 바로 오늘의 시급한 현실 풍경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지금을 사는 것’이라고 작가는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귀를 닫고 오로지 입시에 매달리는 이 시대의 많은 자녀와 부모들에게 ‘지금을 살아야’만 진정한 나로 살 수 있다는 작가의 조용한 메시지는 윤아의 발걸음을 따라 서서히 호소력을 얻으면서 책장을 덮을 즈음엔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둔중한 울림을 준다.
『시간 가게』를 읽은 독자들이 단 십 분만이라도 ‘나는 어떨 때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은, 아이들을 어른에 의해서 통제되는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묻고 세상과 타인과 관계를 맺어 갈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로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어린이 독자들이 기다리는 동화는, 현실의 삶이 빠진 채 환상계의 묘사에만 치중한 판타지나, 서사로서의 재미를 담보하지 못한 절름발이 작품이 아니다. 동화의 독자인 아이들을 둘러싼 현실을 예리하게 직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마음을 그들의 입장에서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위로와 용기를 주려 한 작가의 진정성이, 이 작품이 ‘문학’의 본질과 독자의 마음에 바짝 다가서도록 돕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시간 가게』는 독자들을 감싸 안고 그들의 친구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