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 평전 - 문화예술을 사랑한 어린이 인권운동가
우리는 방정환을 너무 몰랐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날의 창시자’라는 수식어로 인해 진면목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안타까운 위인이다. 33년의 생애 동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혼신을 다해 그가 구하고자 한 일은 나라의 독립이었다. 하지만 전방위적 실천가였던 그에게는 단 하나의 수식어만을 대표적으로 붙일 수가 없다. 방정환을 하나의 ‘주의(ism)’ 안에 집어넣기에 그의 깨어 있는 정신과 포용성은 너무도 넓었기 때문이다.
방정환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이 주체성을 잃지 않고 독립을 반드시 이루어 내도록 인권운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폭넓은 문화적 감수성으로 사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도록 예술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그 방법으로 어린이운동과 ‘잡지’라는 매체를 선택하였다.
이와 같은 소파의 일생을 치우치지 않게 그리기 위해, 저자는 소파의 아들과 소파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소파의 일본 유학지를 방문하였음은 물론 1920~30년대의 신문과 잡지를 거의 확인하고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도서관, 중앙대도서관, 강원대도서관, 천도교회 자료실 등을 몇 번이고 들락거렸다. 그러면서 소파는 투쟁보다 화합을, 이념보다 인간애에 비중을 더 크게 둔 운동가였음을 분명하게 확인해 내었다.
어린이날의 창시자라는 이유로 진면목을 인정받지 못한 거인
『방정환 평전』은 제한된 틀 속에 가둘 수 없이 ‘큰 생각’을 실천한 ‘큰 사람’ 소파 방정환의 일대기이다. 책에는 대가족제도ㆍ식사 준비ㆍ전통 의복과 주택의 개선을 주장하고 그것을 실천한 실용주의자 방정환, 사회를 개혁하고자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으나 사상에 구속당하지 않은 진보주의자 방정환, 남녀가 다르지 않으며 계급에 따라 인간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평등주의자 방정환, 계급주의의 모순으로 희생당하는 민중을 염려하고 나약한 위치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을 위하고자 애쓴 박애주의자 방정환, 서구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소개해 민중의 자주ㆍ독립ㆍ자유의 사상을 인식시키고 그 지평을 넓히고자 한 열정적 문화운동가 안정환, 전 세계 20개국이 참가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 등을 개최한 풍부한 콘텐츠를 가진 벤처형 문화 사업가 안정환, ‘비행사 안창남 귀국 비행’ 같은 온 민족이 열광하는 쇼를 추진한 이벤트 기획자 방정환, 「은파리」라는 풍자문학을 통해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불평등 구조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가진 자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과 세태를 칼끝처럼 날카롭게 비판한 사회비평가 방정환, 《개벽》《어린이》《신여성》 등 10개의 잡지를 발행한 탁월한 저널리스트 방정환, 어린이날 선전문ㆍ소년보호운동 문구ㆍ잡지 광고 문구 등을 완성한 명카피라이터 방정환, 매해 70여 회 이상 생애 통산 1,000번 이상의 동화구연대회ㆍ연극 공연ㆍ강연회를 진행하여 청중을 사로잡은 명강사 방정환, 중앙보육학교와 경성보육학교에서 아동 유희를 강의한 훌륭한 교육자 방정환… 등 하나의 주의로 담을 수 없는 소파 인생의 장대한 감동을 담고 있다.
소파의 어린이날 선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어린이날은 왜 단순한 잔칫날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맥이 닿아 있는가
소파의 어린이(소년)운동에 대한 기본 인식은 독립운동을 촉발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조국의 현실은 어른을 상대로는 어떠한 운동도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극도의 탄압에 못 이겨 우리 민족의 양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그들이 현실에 무너져 국권피탈에 순응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행동’을 해야 했으나 일본인들의 날카로운 경계의 눈빛은 삼엄했다. 그랬기에 겉으로는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평범한 단체인 양 보이게끔 했던 것이다.
어린이를 운동의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이유는 짓눌림과 가난 속에서 웃음을 잃은 슬픔 많은 어린이가 처한 현실에 대한 뼈저린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고 약해서 가장 다치기 쉬운 어린 시절을 지켜 줌으로써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건강한 국민으로 성장하길 바랐던 것이다. 아이들의 주인 정신이 이 나라를 지키는 힘으로 커지리라 믿었던 것이다.
아직 현실에 찌들고 무기력해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어른된 자들이 그들을 돌보고 지켜 준다면 국권 회복에 기대를 걸어 볼 수 있다는 의지였다.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소파와 민주적 인권 옹호와 일제 저항운동의 방편으로 소년운동을 자각한 색동회 인사들의 사상이 결합하여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어린이날’ 제정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소파와 천도교 조선소년운동협회가 발표한 ‘소년운동의 기초 조건’은 세계 최초의 아동인권선언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그 의미가 더욱 커진다.
9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에도 소파가 외친 ‘어린이 선언’은 유효하다. ‘사람의 권리’라는 기본이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는 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었다면 21세기 초인 오늘날에는 주체성을 찾아내기 위한 독립운동이 펼쳐져야 할 시점이라 하겠다.
소파가 어린이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과정
그의 사상적 변모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소파는 10세까지는 집안이 부유하여 어른들이 경제에 대한 개념을 가르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하여 완전히 몰락하면서 하루 먹을 쌀이 없어 꾸러 다니고, 땔나무를 해다 팔고, 학비가 없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극빈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가 좌절하거나 극단적인 사상을 갖거나 편협한 안목을 갖지 않았던 데는 소파의 낙천성, 삶에 대한 열정, 천도교도였던 가족의 영향이 있었다. 소파의 아버지는 천도교도로서 동학혁명에 적극 참여하였고, 소파는 그 바탕에 있는 민족적 주체성과 자긍심을 자양분으로 흡수하며 자라났다. 소파에게 생명의 소중함이란 공기와도 같았을지 모른다.
고작 7살 때 스스로의 의지로 신식학교를 선택해 다니고, 10살 때는 토론 모임을 만들어 아이들을 이끌었으며, 12세의 나이로 소년유년군을 조직해서 160여 명을 휘하에 둔 총대장을 지낸 일 등은 유년 시절부터 남달랐던 소파의 비범함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따듯한 감수성을 지녔던 소파는, 일제 식민 치하에서 군국주의를 숭상하며 학생들을 군인처럼 훈련하는 교육 행태를 체험하며 ‘인권’의 중요성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인권과 자유의 중요성을 느끼며 성인이 된 소파가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앞둔 순간 “내가 이렇게 간다니 창피해”라고 한 말 속에 그의 한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방정환의 운명의 사람, 의암 손병희와 만해 한용운
민족의 큰 스승과의 만남
소파는 어린 시절 당대의 문학가들이 펴낸 잡지를 보며 자신의 막연한 뜻에 실체를 더하고, 문화가 사람의 정신을 깨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깨달았다. 그러면서 소파의 무의식 속에 문화운동에 대한 열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소파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작품을 이와 같은 잡지에 투고하면서 대작가가 되고자 하였다. 그 자신이 책에서 눈부신 신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원고를 투고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스승 만해 한용운과의 만남도 시작된다. 소파는 제2의 고향을 만해의 고향인 충남 홍성으로 여길 만큼 한용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 하나 소파의 인생을 가르는 중대한 인연은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와의 만남이다. 나중에는 손병희의 사위가 됨으로써 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던 소파에게 분명한 길이 열리게 된다.
사람에게 아무리 큰 뜻이 있다 해도 기회를 얻지 못하면 좌절하고 만다. 그런데 소파는 당대의 대표적 인물인 만해와 의암 선생을 만났으니 가히 하늘이 인생의 문을 열어 주었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다. 물론 거기에는 소파의 따듯하고 순수한 진심, 열린 사고, 그리고 열정과 꾸준한 노력이 우선하고 있다.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선택한 ‘잡지’
잡지 저널리즘의 창시자 소파 방정환
민족 자주권 회복을 고민하던 소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문화운동이었고, 그 최고의 매개체는 출판물이었다.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어 문학작품의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생각한 소파는 문학가이자 언론인으로서 온 조선에 정신적인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였다.
나라의 장래는 어린이(소년)에게 있고, 나라가 변하려면 어린이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소파는 교육+실리+흥미가 결합된 잡지 《어린이》를 만들었고 그 잡지의 필자로서 요즘 시대의 슈퍼스타와 같은 인기를 끌었다.
잡지 운영 방식이나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행했던 이벤트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진 것으로써, 소파의 머릿속에서 나온 우리나라 잡지의 기원을 확인해 보는 것도 『방정환 평전』을 읽는 재미라 하겠다.
서울 인구 30여 만 명에 신문 발행 부수가 5만이던 당시 《어린이》지는 10여 만 독자를 확보하였으니, 이 수치만으로도 소파의 기발하고 진취적이었을 역량이 짐작된다. 소파가 독자를 늘리기 위해 힘을 쏟았던 이유는 수익 때문이 아니라 소년운동을 위한 투자가 목적이었다. “더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그래도 우리가 안타깝게 무엇을 구하기에 노력하는 것은 내일은 잘될 수 있겠지 하는 한 가지 희망 때문이고, 그 희망이란 내일의 조선 일꾼 소년 소녀들을 잘 키우는 것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린이》지가 발행된 출판사는 천도교청년회 편집부의 지원을 받는 개벽사로서 소파는 이 공간에서 총 10개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수많은 아동문학가를 길러 냈을 뿐 아니라, 《개벽》 등의 잡지를 통하여 사회를 개혁하고 혁신하고자 한 진보적 젊은이들의 사상과 생각을 담아내었다.
소파가 친일 매국 행위를 했다?
3.1 독립운동 직후 지식인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선진 문명을 받아들인 그들에게서 배울 게 있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소파가 살았던 시대의 일본 유학을 곧, 친일 또는 친일적 성향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소파가 유학한 최고의 이유는 독립운동을 함께할 동지를 만나고 얻기 위해서였으며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선진사회의 사상들을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소파가 순수의 세계에 빠져 현실을 외면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의 행적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개벽사를 기반으로 한 문화 활동을 비롯하여 그가 쓴 글들을 확인한다면, 소파의 현실 인식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수단을 어떻게 강구하였는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생애 통산 800편 이상의 글을 남긴 소파는 아이들을 위한 순수 문학작품 외에도 실용적인 글, 발랄한 유머로서 현실을 직시하는 글, 풍자적이고 통렬한 사회 비판적인 글까지 전방위적으로 썼다. 그 가운데 연재물 「은파리」를 보면 일제 경찰이 왜 그토록 방정환을 끊임없이 미행하고 감시하고 투옥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한편 살림살이에 관한 글은 90년 전에 씌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보적이고 실용적이다.
소파는 일본 경찰 요시찰의 대상으로서 몇 차례 검거되어 고문을 받는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파는 풍부한 감수성으로 세상을 품고 부조리를 통렬히 비난한 실천가였다. 소파의 활동은 소년운동을 들불처럼 타오르게 했고, 나라 잃은 사람들에게 조선의 정체성을 가르쳐 주었고, 불우한 환경을 비관하며 절망에 울던 소년들에게 희망을 되찾도록 해 주었고,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를 왜 존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소파 방정환 평전』이 소파를 협소한 사상가로 인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의 진짜 모습을 알리는 계기가 되고, 어린이의 인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