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
미끄러지듯 매혹되는 이야기의 끝,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한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을 훔친 비밀스러운 인물의 행적을 추적해나가는 이 유려한 미스터리는 때로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침없이 삶을 뒤엎는 한 인물의 일생을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겹쳐가며 복원해낸다. 그렇게 내달려온 이야기의 끝, 지금까지 촘촘하게 쌓아온 서사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반전은 강렬한 전율에 목말라 있던 우리를 가을밤의 싸늘한 한기 속으로 끌어다놓는다.
삶에 대한 긍정의 자세와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인생의 비의를 길어올리는 소설가 정한아의 세번째 장편소설 『친밀한 이방인』이 출간되었다. 『달의 바다』(2007), 『리틀 시카고』(2012)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장편으로, 오랜만에 한국문단에 강력한 반전을 선사하는 반가운 작품이기도 하다.
이름, 학력, 직업, 성별……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한 사람
허상을 겹치고 덧발라 만들어낸 수십 개의 가면 뒤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의 민낯!
칠 년 동안이나 소설을 쓰지 못한 소설가 ‘나’는 어느 날 신문에서 흥미로운 광고를 발견한다. ‘이 책을 쓴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신문 전면에 어떤 소설의 일부가 실려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을 읽어내려가던 ‘나’는 충격에 빠진다. 그 소설은 ‘나’가 데뷔하기 전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문예공모에 제출했던 작품으로, 공모전에서 낙선한 뒤로 까맣게 잊고 지내온 터였다. 신문사에 더이상 광고를 싣지 말라고 연락하자, 뜻밖의 인물이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육 개월 전 실종된 남편을 찾고 있다는 여자, ‘진’이었다. 놀랍게도 ‘진’은 그녀의 남편이 광고 속의 소설을 쓴 작가로 행세했다고 말한다. 남편의 거짓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본명은 이유미, 서른여섯 살의 여자예요. 내게 알려준 이름은 이유상이었고, 그전에는 이안나였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여자라는 사실까지 속였으니 이름이나 나이 따위야 우습게 지어낼 수 있었겠죠. 그는 평생 수십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았어요. 내게 이 책과 일기장을 남기고 육 개월 전에 사라져버렸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설가인 줄 알았던 남편이 사실은 여자였고, ‘진’을 만나기 전부터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문제의 인물 ‘이유미’는 합격하지 못한 대학에서 교지 편집기자로 활동했고, 음대 근처에도 가본 적 없으면서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자격증 없이 의사로 활동했다. 또한 그녀는 각기 다른 세 남자의 부인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 살았다. ‘나’는 점점 ‘이유미’가 살아온 삶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이유미’의 행적을 추적해나가면서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할 수 있으리라 예감한다.
“지난주에 당신을 만나고 나서, 일주일 내내 마치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궁금한 것이 점점 더 늘어나는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의 반복된 거짓과 위증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그 시작과 끝을 알고 싶어요. 단순한 흥미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의 어떤 순간마다 ‘이유미’와 스쳐갔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유미’의 뒷모습을 좇기 시작한다. 그녀의 발자취가 끊기는 곳에서 ‘나’는 그녀의 실체와 그녀가 감추고 있던 진실에 가닿을 수 있을까?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도하고 만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이 박진감 넘치는 소설을 쓴 작가가 『달의 바다』로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이래 장편소설 『리틀 시카고』,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 『애니』를 통해 서정적인 문체로 동세대 인간 군상의 생을 연민하고 긍정해온 소설가 정한아라는 점은 놀랍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필연적으로 속해 있지만 대개는 불완전한 형태일 수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틀에 대해 오랜 시간 사유해온바, 『친밀한 이방인』에 이르러 그 천착의 결과를 미스터리 서사로 풀어내는 새로운 도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유미’뿐만 아니라 ‘나’와 ‘진’, 그리고 그 가족들은 각각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기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에게는 굳이 드러내놓지 않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나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모른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면서 그 자리에 함께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엉망진창인 삶의 실체를 비밀로 가려둠으로써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한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명확한 이해가 아닌 모호한 낙관과 희망에서 생겨난다는 이 책의 메시지가 묘한 안도감을 건네는 이유다. 이 아이로니컬한 생의 비의를 체감한 정한아의 새로운 소설세계가 이 책에서부터 펼쳐지기 시작했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또 한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는 조용히 기울어가는 대신 한 번쯤 이 생을 던져보고 싶을까. 그 끝이 절망이더라도, 나락이더라도, 기꺼이. 그러나 아름답게. 어차피 진짜 생 같은 것은 없으므로.
이야기는 거침없이 흐른다. 잠시 멈추어 숨을 가눌 사이도 없이. 하나의 인생은 또하나의 인생으로 대체되고 거짓은 더 깊은 거짓으로 대체되다가 마침내 진실이 된다. 모든 거짓의 총합, 그것이야말로 진짜 삶인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이야기의 변신만큼이나 작가의 변신도 놀랍다. 이야기를 베어내는 칼날은 작가 자신에게도 향해 있는 듯 보인다. 머뭇거리지 않고, 작가는 그렇게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어 날렵하기 짝이 없는, 또다른 이야기의 몸이 된다. _김인숙(소설가)
나는 늘 거짓말쟁이와 사기꾼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들이 꾸는 헛된 꿈, 허무맹랑한 욕망이 내 것처럼 달콤하고 쓰렸다. 나는 그들을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착각, 혹은 간극 속에서 이야기를 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_‘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