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수많은 독자들을 헌책방으로 이끌었던 전설적인 소설
원서 출간 30주년 기념, 「저자 후기」를 더해 다시 돌아오다
1995년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의 한 권으로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소설 마니아들을 전율시키며 발 빠르게 입소문을 탄 전설적인 작품이 있다. 일본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파격적인 언어와 신랄한 상상력으로 문단의 이단아로 불린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다. 아쉽게도 절판이 되어 소설광들을 헌책방 순례에 나서게 만들고 희귀본 수집가 사이에서 귀한 몸값을 자랑하던 이 책이 10여 년 만에 새 단장을 마치고 돌아와 열혈 독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있다.
원서 출간 30주년을 앞두고, 이번 개정판에서는 초판에는 실리지 않았던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후기」를 추가했다. 그 안에는 ‘일본 야구’를 내세워 소설을 쓰게 된 일화와 이 책에 얽힌 크고 작은 해프닝, 작가로서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되어준다. 더욱 완성도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기존의 팬들에게는 남다른 감회와 여운을, 새로운 독자들에게는 과거의 명성을 직접 경험해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제1회 미시마 유키오상 수상작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치는 게임이라고도 전해진다”
야구가 사라진 세상, 괴짜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이야기!
어느 미래의 가상 세계, 그곳에 ‘야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흔적이라고는 두툼한 국어사전 속 사어(死語)로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야구에 대한 집념을 키워가는 별난 사람들이 있다. 카프카야말로 열렬한 포수였다고 믿으며 야구에 관한 글만 모으는 노인, 야구를 배우기 위해 900편의 야구 시를 쓰고 100편의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것에 도전하는 초등학생 1학년, 공이 너무 잘 보여 칠 수가 없다는 4번 타자와 라이프니츠에 매료된 슬럼프에 빠진 주전 투수, 그리고 일기를 교환하기 위해 여동생을 낳아달라는 ‘네케레케세맛타’ 신까지. 우스꽝스럽게 뒤틀린 야구광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야구의 본질에 대해 파고들고, 그 모든 시도들은 1985년 한신 타이거스 우승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향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일곱 가지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야구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화자나 시점, 전개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바탕으로 최적의 타구를 논하거나, 야구 선수들의 수비 연습을 포르노 보기에 비유하고, ‘네멘호텝’, ‘네케레케세맛타’처럼 임의로 지어낸 신들을 내세워 일본 신화를 비틀기도 한다. 그러나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세세한 단편들은 피카소의 그림처럼 각각의 조각이 하나씩 모이고 연결되면서 마침내 거대하고 복잡한 야구라는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치는 게임”이라는 일차원적인 수준을 넘어, ‘진정한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이르는 것이다. 야구가 사라진 미래에서 벌어지는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삶의 궤적을 담은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그 신랄함과 참신함을 인정받아 제1회 미시마 유키오상을 수상하였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
매너리즘에 빠진 문학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작가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다. 물론 그는 고등학생 때 첫 평론을 발표하고 직접 연극 각본을 썼던 문학청년이었고, 훗날 “잘 표현해낼 말이 없어 소설을 쓰게 되었다”라는 메모를 남겼을 정도로 문학에 깊이 심취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구치소에 구금되어, 그때의 충격으로 겪었던 실어증은 그의 작가 인생에 결정적인 한 획을 그었다. 1979년 글쓰기를 재개할 때까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를 무기로 삼았던 문학청년이 말을 잃는 좌절을 딛고 소설가, 평론가로서 언어에 관여하고 표현하는 길을 다시 택했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대단한 애착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문학 따위는 무섭지 않다』, 『문학이 이토록 잘 이해돼도 되는 건가』, 『문학왕』, 『문학이 아닐지도 모르는 증후군』, 『일본 문학 성쇠사』 등 ‘문학 읽기’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줄줄이 발표했다. ‘읽기’라는 문학의 기본으로 돌아가 ‘문학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졌던 것이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문학에 대한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그런 고민이 가장 발전된 형태로 드러난 작품이었다.
언제였을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필립 로스의 『멋진 미국 야구』라는 번역본을 읽고,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발단이었다. (……)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나도 일본 야구를 통해 일본인들의 마음속 비밀에 다가가 궁극적으로 일본 문학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후기」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단순히 야구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의 산물이자 소설에 대해 쓴 글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야구와 정체성, 문학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 야구를 통해 문학의 본질을 찾는 소설을 쓰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였다. 진정한 야구를 좇는 야구광들의 지난한 몸부림은 곧, 진정한 문학을 향한 그의 필사적인 노력인 셈이다. 기교에 불과한 배팅으로 슬럼프를 넘기려는 코치부터, 홈런을 연발하지만 타격 자세는 엉망진창인 타자, 승률은 1위이지만 방어율은 최악인 투수, 선수 명단을 감동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야구장 아나운서들, 경기에는 집중하지 않고 상대 팀을 비난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관중들까지.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아이러니에 빠진 야구광들의 단편을 보여주며, 고루한 형식과 관습에 갇혀 위기를 자초한 오늘날의 소설을 향해 뼈아픈 일침을 던지고 있다.
“환상적 장난이라고 할까. 한번 신선했던 것은 오래간다.” _ 성석제(소설가)
모더니즘 소설의 어법을 파괴한 문학 읽기의 신세계
일본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답게,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소설의 형식을 거부한다. 기승전결로 압축되는 모더니즘 소설의 서사 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은 일정한 줄거리도 없이 연결고리가 헐거운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당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던 글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깨달으면서 짜릿한 쾌감에 전율하게 된다. 파격에 가까운 언어 표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소설의 긴장감을 더한다. 고양이에게 ‘365일의 반찬 백과’, ‘다자이 오사무 주간’이라는 의미 없는 이름을 붙이거나, ‘찬치키오케사’, ‘덴파이폰친 체조’, ‘도라에몽’ 등 시대 풍속에 너무 밀접한 나머지 보편성을 잃은 단어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히라가나만 읽는 여자의 입을 빌려 조사와 어미를 쭉 늘어놓기도 한다. 거의 기호에 가까운 단어들은 언어의 고정된 의미나 관습적인 이미지를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 표현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야구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한 편의 멋진 환상처럼 펼쳐지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에는 기존 소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함께 문학이 나아가야 할 청사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전히 ‘문학의 위기론’이 대두되는 현실 속에서 이 작품이 여전히 유효한 대안을 제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과감한 형식의 파괴와 신랄한 상상력, 파격적인 언어 표현이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초판이 출간된 30여 년 전과 변함없이 독보적인 참신함을 과시하며 낯선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