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라그 연대기 1
낡은 판타지에 대한 전복 선언,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괴물과의 싸움
1. 뉴위어드(New Weird)란 무엇인가?
2003년 4월 29일, 호러/다크 판타지 성향 작품들이 주로 실리던 영국 잡지 〈서드 얼터너티브〉의 온라인 게시판에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 도발적인 주장도 없는 몇 가지 질문들의 조합에 불과한 이 글 아래로 수많은 SF/판타지 작가와 평론가, 독자들이 달려들어 몇 달 동안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글쓴이는 영국의 소설가인 M. 존 해리슨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뉴위어드. 어떤 작가들이 쓰는가? 이것은 무엇인가? 실체는 있나? 새롭기는 한 건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2의 뉴웨이브’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구호인가? 그냥 잡탕소설이라고 하면 안 되나? 늘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의 의견이 듣고 싶다.”
뉴위어드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바로 이 논쟁을 통해서였다. 논쟁 자체는 뉴위어드의 정의보다 그 성격과 방향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는데, 이는 초기부터 참가자들이 뉴위어드의 개념이나 문학적 기원에 관해 상당 부분 의견 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을 지칭하는 ‘뉴’위어드라는 단어는 이미 이전에 ‘올드’위어드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기서 ‘올드’위어드란 다름 아닌 클라크 애시튼 스미스, 로버트 E. 하워드, 그리고 특히 H. P. 러브크래프트를 위시한 1930년대 펄프 잡지 작가들이며, ‘위어드’란 단어도 그들이 자주 기고하던 펄프 잡지인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들이 장르의 전면적인 질적 개혁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20세기 초 펄프 작가들의 영향 아래 있음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면서 J. R. R. 톨킨과 그의 작품 《호빗》,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을 모방하는 주류 판타지 소설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초기 펄프 소설들의 특징인, SF/판타지/호러 등 하위장르로의 분화가 분명하게 이루어지기 이전의 역동성까지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들의 작품 대부분은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날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차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판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세계를 구성하는 각종 물질과 현상의 이면에 깔린 법칙에 체계적,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는 과학소설을 방불케 한다. 게다가 기저에 깔린,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퇴폐적이며 기괴한 분위기는 온전히 공포소설 특유의 것이다.
특히 공포소설과의 근연성은 뉴위어드를 지금까지의 사이언스 판타지와 분명히 구별 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뉴위어드의 기저에 〈위어드 테일즈〉를 비롯한 초기 펄프 소설 시기 공포-괴기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 무자비하리만치 잔인하고 노골적인 유혈 묘사나, 왜곡된 형태로 재조립된 생체에 대한 기호는 제프 밴더미어가 지적한 대로 1980년대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Books of Blood)》과 소위 ‘스플래터펑크(splatterpunk)’라고 부르는 일군의 새로운 공포소설들에서 힘입은 바 크다. 이런 공포소설의 감성은 뉴위어드의 판타지를 더 이상 도피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없게끔 만들었다.
“동화에 관한 자신의 에세이에서, 톨킨은 위안(consolation)이 동화, 지금은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위안을 주는 판타지라니,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소리다. 독자가 위안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작품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책의 목적이 본질적으로 위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도전하거나 전복시키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이는 안정지향적이며, 미학적으로 완전히 경직된 사고방식이다. 난 그런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판타지는 위안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판타지의 미학을 위안에 저항하는 데 사용한 초현실주의야말로 최고의 판타지다.”
아울러, 뉴위어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두 편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한국에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삽화가로 더 잘 알려진 머빈 피크가 쓴 판타지 시리즈 〈고멩가스트 3부작(Gormenghast trilogy)〉으로, 그론 백작가의 77대손인 타이터스 그론이 마침내 자유를 찾아 영지인 고멩가스트 성(城)으로부터 뛰쳐나가서 바깥세상과 맞닥뜨리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고멩가스트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앞의 두 권뿐이기 때문에 사실 고멩가스트 3부작이라는 명칭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멩가스트의 시각적 이미지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퇴락한 성채와 허물어진 건물들로 가득 찬 압도적인 규모의 거대한 성채이자 도시국가인 고멩가스트는 후일 뉴위어드 계열 작품 속에서 빈번히 묘사되는 어둡고 퇴폐적인 도시들의 원형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M. 존 해리슨의 〈비리코니엄 사이클(Viriconium cycle)〉로, “오후의 문명“이라고만 언급되는 불명확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가공의 도시국가 비리코니엄을 배경으로 한 일군의 이야기들이다. 처음 이 세계는 잭 밴스의 《죽어가는 지구(the Dying Earth)》 같이 현재로부터 시간상 아주 먼 미래처럼 여겨지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도시의 이름마저 경우에 따라 ‘유리코니엄’이나 ‘브리코’로 계속 미묘하게 변하는 등 점점 더 모호해지며, 심지어 세 번째 장편 《비리코니엄》에서는 주인공인 화가 오즐리 킹이 작품 속에서 진정한 “현실 세계”로 현대 런던을 그려내는 장면을 통해 비리코니엄의 세계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이는 톨킨 이후의 작가들이 각종 가공의 지도나 연대기 등을 통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견고한 실재감을 부여하려고 애썼던 것과는 정반대로, 뉴위어드 특유의 몽환적인 색채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뉴위어드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앞서 언급한 2003년의 논쟁이 처음이었지만, 뉴위어드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은 이미 2000년을 전후하여 상당수 등장한 상태였다. 특히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작가가 차이나 미에빌로, 그는 과학기술과 마법이 공존하는 폭압적인 도시국가 뉴크로부존을 배경으로 한 비참한 모험담을 다룬 이 책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Perdido Street Station》(2000)을 발표하여 상업적/비평적 성공을 거두며 평단과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이듬해 제프 밴더미어는, 강대하고 기이한 권능을 지닌 버섯인간 종족 그레이캡을 지하로 몰아내고 그 지상에 건설하였으나 불가사의한 위협과 멸망의 암시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가공의 도시 앰버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빼어난 단편집 《The City of Saints and Madmen》(2001)을 통해 메타픽션식 전략이나 소설의 암호화 같은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을 도입하는 실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마이클 시스코는 죽음으로부터 소생하여 사막의 도시 샌베네피시오로 파견된 뒤 죽은 자들의 기억을 헤집어 세계의 근본 질서를 형성하는 언어를 추출하려 하는 “신학생”의 탐색을 카프카 풍의 모호하고 환상적인 필치로 다룬 《The Divinity Student》(1999)를 내놓았다. 뒤이어 K. J. 비숍의 《The Etched City》(2003)나 스텝 스웨인스턴의 《The Year of Our War》(2004)가 잇달아 발표되면서 뉴위어드의 서재를 풍성하게 만들었으며, 앤디 콕스가 발간하는 잡지 〈더 서드 얼터너티브〉와 밴더미어가 편집하는 앤솔로지 《리바이어던(Leviathan)》 역시 이런 계통의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했다.
하지만 영화와 만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확산되며 동시대의 문화적 현상으로 발전한 사이버펑크와 달리, 뉴위어드는 대중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둘 다 본질적으로는 장르의 질적 혁신을 지향한 내적 움직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이버펑크가 분명한 주장과 방향성을 제시한 명백한 운동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뉴위어드는 연속성과 차별성은 갖추되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던 결과, 그 파급효과가 상대적으로 미미하여 영향력이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뉴위어드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작풍은 제각각인데,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만한 이데올로그나 선언문(menifesto) 같은 것도 없었다. 더욱이 사이버펑크의 확산의 배경에 깔린 인터넷의 보급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진행이라는, 공시적(共時的) 압력으로서의 과학기술 및 정치사회적 배경도 부재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뉴위어드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공산이 컸다. 초창기부터 뉴위어드로 자처했던 차이나 미에빌의 회고에 주목하자.
“뉴위어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굉장히 답답하다. 뉴위어드가 쓸모없다면, 어설픈 분류체계라면… 좋다,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하지만 사람들은 어쨌거나 분류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가 늘 무언가를 분류하려 든다는 점에서, 그런 태도는 다소 이상하다. 이건 지질학에서 딱지를 붙이고 ‘이것은 이런 종류의 암석이다’라고 하면 끝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문학적 분류는 일종의 도구니까 쓸모가 있는 한 써먹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뉴위어드가 애매모호한 진실 같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던 거다. 그것이 자기 패러디를 반복하면서 무의미해지는 시점이 오자, 그만둔 거고.
갈수록 난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당신들이 뉴위어드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들이 웃긴다고 생각하든 유용하다고 생각하든 간에, 내가 뉴위어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집어치운 것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중략) 잔뜩 힘이 들어갔던 이 영국발 열풍은 2001년에서 2003년까지 지속되다가, 이제 잠잠해지려 하는 것 같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고 주류에서 깨달을 무렵이면, 이미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모든 문학적 운동이나 경향이 그렇듯, 작가들이 문학적 재생산을 거듭하면서 독자들이 처음 느꼈던 충격에 적응하자, 뉴위어드 또한 이제는 초기의 역동성을 잃고 양식화(樣式化)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2008년에 나온 밴더미어 부부의 새 앤솔로지 《The New Weird》의 서문 ‘뉴위어드, 아직 살아 있나?’에서, 제프 밴더미어는 뉴위어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밴더미어의 서술에 긍정한다면, 특정한 양식을 공유한 문학 운동이라기보다 작가 개개인의 심적 상태에 가까웠던 뉴웨이브와는 달리, 적어도 뉴위어드는 어쩌면 독자적인 하위장르로 존속할지도 모를 독특한 양식을 유산으로 남긴 셈이다.
“뉴위어드는, 과학소설과 판타지의 요소를 결합시킨 배경에 복잡한 현실 세계의 모형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전통적인 판타지 세계에 대한 낭만화된 관념을 뒤엎으려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차 세계를 다룬 소설의 한 형태이다. 여기에 뉴웨이브나 그 동시대 작가들(은 물론 머빈 피크나 프랑스/영국의 퇴폐주의 같은 선구자들)에게서 받은 영향은 물론, 어조나 문체, 효과를 위해 초현실적 공포소설의 정서적 특성들도 은연중에 들어가 있다. 뉴위어드는 비록 변형된 상태일지언정 현대 세계를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지만, 언제나 공공연하게 정치성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현대 세계에 대한 자각의 한 형태로서, 뉴위어드는 상상력을 고무하기 위하여 ‘기괴함에 대한 경도(傾倒)’에 의지하나, 이는 이를테면 늪지대에 세워진 흉가나 남극의 동굴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런 작가의 경도(혹은 신뢰)는 다양한 형태를 띠는데, 심지어 일부는 작품의 실재감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도 차용한다.”
정리하자면, 뉴위어드는 판타지가 톨킨과 그 계승자들의 정치적/미학적 보수성과 클리셰 과용 때문에 “오염”되었다고 보고, 이를 “오염” 이전의 상태, 경직된 장르 구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목적으로 지금까지 SF에서나 가능했던 장르 문법을 전복시키려는 급진적인 움직임을 판타지에서 재현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였다. 비록 탈정치적인 전개로 말미암아 운동으로서의 결집력과 방향성 부족으로 그 성과가 장르 외부까지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채 남겨져 있던 판타지의 또 다른 혈통을 복권함으로써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이 장르에 역동성을 불어넣었으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하위장르가 될지도 모를 양식을 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한창 유행했던 시기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은 현재 뉴위어드의 유산(혹은 여파)라고 할 만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전술한 스타일로서의 뉴위어드를 최근 에픽 판타지 쪽에서 차용하여 장르 내로 포섭하려는 경향이다. 마크 섀런 뉴튼이 쓴 〈붉은 태양의 전설(Legends of the Red Sun)〉 시리즈(2009~)는 곧 닥쳐올 빙하기 앞에 놓인 고대 왕국의 수도 빌자머를 배경 삼아 뉴위어드의 장치들을 ‘죽어가는 지구’ 이야기와 결합한 작품으로 에픽 판타지 작품들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생태학적 측면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그 밖에 ‘거인의 시체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너무나 미에빌스러운 배경에 코믹스 슈퍼히어로물의 요소를 섞은 마이크 R. 언더우드의 장편 《Shield and Crocus》(2014)나, 마법과 과학과 괴물들이 혼재하는 류릭 데이비슨의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 〈Calie-Amur〉 시리즈(2014~) 역시 미에빌의 영향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다만 뉴위어드 풍 에픽 판타지 소설들의 경우 특정 작가(미에빌)로부터의 협소한 영향력이 너무 두드러져 대체로 독창성이 부족하며, 뉴위어드까지만 해도 아직 어느 정도 남아 있던 괴기성(weirdness)이 많이 휘발되었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오히려 더욱 주목해 볼 가치 있는 다른 하나의 경향은, 2010년 전후로 특히 공포소설 쪽에서 두드러진 현상인 괴기소설(weird fiction)의 귀환이다. 물론 괴기소설의 재조명이 전적으로 뉴위어드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적어도 주류에서 다루어질 만큼 운신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출판 환경의 변화(독립출판의 활성화, 전자책의 보급 및 크라우드 펀딩 등)로 괴기소설을 창작, 유통할 수 있는 창구가 많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토머스 리고티 같은 거장이 특유의 허무주의/염세주의적 관점이 깊게 배어든 수준 높은 작품들을 선보여 이 분야의 문학적 기준을 끌어올린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케이틀린 R. 키어넌, 레어드 배런, 조지프 S. 풀버, 사이먼 스트란차스, 리처드 개빈, 존 랭건, 제프리 토머스, W. H. 퍼그마이어, 젬마 파일즈와 리비아 리웰린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재능 있는 작가들이 괴기소설의 영역을 활발히 개척하고 있으며, 특히 스캇 니콜레이가 주창한 도그마 2011(Dogme 2011)이나 2011년 세계환상문학상 상패 사건 등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유산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머잖아 공포소설 분야의 내부 혁신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도 기대해 봄 직하다.??
2.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자본주의라는 괴물과의 싸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차이나 미에빌이 데뷔 장편 《쥐의 왕(King Rat)》에 이어 2000년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으로, 아서 C. 클라크 상과 영국판타지문학상 장편 부문을 수상하면서 비평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뉴위어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촉발시킨 작품이다. 본작은 이후 발표된 두 권의 연작들과 연결되어 다음과 같이 〈바스라그 연대기〉를 이룬다.
〈바스라그(Bas-Lag) 연대기〉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Perdido Street Station)》(2000)?장편(본작)
《상흔(The Scar)》(2002)?장편
《강철의회(Iron Council)》(2004)?장편
〈잭(Jack)〉(단편집 《제이크를 찾아서(Looking for Jake)》(2005) 수록)?단편
두 번째 책인 《상흔》에서는 아이작의 전 여자 친구로 잠시 언급된 벨리스 콜드와인이 슬레이크 나방 사건의 결과로 인한 시 정부의 추적을 피해 바다 건너 식민지로 달아나다가 해상 해적 도시 아마다로 나포되면서 겪게 되는 사건들을 다룬다. 한편 세 번째 책인 《강철의회》에서는 프리메이드와 철도 노동자들에게 탈취당한 대륙횡단 철도 ‘강철의회’ 호가 첫 권의 시점으로부터 20여 년 뒤 뉴크로부존 내부에서 진행 중인 노동자 혁명에 호응하기 위해 도시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어나는 일을 그린다. 단편 〈잭〉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잠시 등장했던 프리메이드의 지도자 사마귀팔 잭의 일대기를 다룬 단편으로 본편 이후 야가렉의 마지막 행적을 접할 수 있다.
전작 《쥐의 왕》이 긴박한 전개와 격렬한 전투 장면, 정글 뮤직으로 대표되는 동시대 하위문화의 현장감 같은 장점에도 등장인물에 대한 얄팍한 묘사나 한계가 명확한 정치적 입장 표출로 약간 아쉬움을 남긴 것과는 달리, 〈바스라그 연대기〉의 첫 작품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는 분량이 대폭 늘어난 만큼 공간적 배경인 뉴크로부존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행동이 더욱 깊이 있게 묘사되고 있으며, 작중에서 등장하는 각종 장치와 그 의미가 더욱 세심하게 구축되어 있다.
작중에서 여러 가지 서사가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지만, 그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바로 슬레이크 나방을 추적, 박멸하는 이야기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특정 계급과 그 양태에 대응시킨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뱀파이어나 좀비 같은 유명 몬스터와 비교할 때, 슬레이크 나방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작중에서 모틀리가 나방들을 “공장 설비”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잘 드러나듯) 이들이 드림싯이라는 마약을 생산함으로써 뉴크로부존 (지하) 경제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일종의 생산 수단에 해당하는 나방들은 스티븐 샤비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그 자체를 문학적으로 체현한 “자본주의자 괴물(capitalist monsters)”이 되는 셈이다. 이런 해석은 다음 두 가지 작중 장치로 뒷받침된다. (i) 현실의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들을 임노동자로 끌어들이면서 자유로운 노동 능력을 사고 팔리는 재화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슬레이크 나방 역시 뉴크로부존 희생자들의 정신, 그리고 꿈을 빨아들여 시민들을 중독시키는 마약으로 물화시킨다는 것, (ii) 자본 그 자체의 탐욕이 내부의 모순을 가중시켜 체제를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나방들의 무한한 먹이 수요와 도시의 제한된 공급이 슬레이크 나방의 생태계를 유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따라서 하여금 위기 기관이 가중시킨 내적 모순으로 증폭된 인공 정신을 슬레이크 나방으로 포식하도록 함으로써 폭사시킨 것은 지극히 마르크스주의적 해법이라 할 수 있다.
나방들과 마지막 대결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페르디도 거리 기차역’이 작품 전체에서 유의미한 사건이 진행되는 공간적 배경으로 사용되는 부분이 얼마 되지 않으면서도 작품 전체의 제목으로 당당히 사용되는 것도 그곳이 물리적인 면에서 모든 도시 전력망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면에서는 이 도시 뉴크로부존 그 자체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이작이 나방들을 비롯하여 시 정부의 군 병력 및 모틀리의 리메이드 부대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비록 도시의 현실 정치를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상징적인 차원에서 뉴크로부존이라는 도시와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체제에 대해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비록 이렇게 작품 내에서 각종 구조와 상징을 세심하게 쌓아 올리고 있으나, 이것들은 작가의 정치적 의식에 대한 문학적 구현으로 보아야 할 뿐 작품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투영한 메타포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독자가 수로크에 투하된 토크 폭탄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원자폭탄을, 잇달아 정복 전쟁을 일으키며 제국주의적 확장에 나선 뉴크로부존을 통해 미국을 연상하게 되더라도, 본작이 현실 세계의 근현대사를 은유하거나 풍자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의미이다. 미에빌이 톨킨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렇게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는 판타지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건 다소 아이러니하다.
? 이동현,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