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문 앞에서 - 모리스 마테를링크 선집 3
“촛불의 운명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깨달음에 첫발을 내딛고 있을 것입니다.”
〈국내 초역 모리스 마테를링크 선집〉 『파랑새』작가 ? 노벨문학상 수상자 ? 벨기에 셰익스피어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경이를 비로소 만나다!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침묵과 불안의 작가 마테를링크의 죽음에 대한 탐구 소멸의 운명 앞에서 삶에 묻다!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제 무엇을 원하는가?
장엄한 침묵의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누구에게나 온다.”
◎ 도서 소개
『파랑새』작가 ? 노벨문학상 수상자 ? 벨기에 셰익스피어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경이를 비로소 만나다!
국내 초역 모리스 마테를링크 선집
천천히 읽고 오래 음미하는 명상의 말
“촛불의 운명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깨달음에 첫발을 내딛고 있을 것입니다.”
‘벨기에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우리에게 『파랑새』로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시인이자 희곡 작가인 그는 많은 산문을 남겼고, 이번에 출간된 [모리스 마테를링크 선집]은 그의 산문 가운데서도 엄선한, 오랜 세월 가장 사랑받은 작품들이다. 『파랑새』를 통해 ‘행복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그는, 희곡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에도 고독과 은둔을 지향하며 스스로 낮추는 삶을 택했다. 죽을 때까지 자연 속에 살면서 삶의 근원적 가치를 탐색했고, 삶과 죽음, 사랑, 행복, 운명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며 생각의 단상들을 엮어 시적인 문체로 산문에 담았다.
[모리스 마테를링크 선집]은 어떤 철학 사상이나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자연을 바라보고 삶을 성찰한 결과물로, 우주적 진리를 자유롭게 탐구하는 시선과 신비주의적 관점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과학자와 같은 세밀한 관찰이 녹아 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사유 속에서 솟아나는 물음과 대답들을 한 조각씩 이어가며 큰 그림을 완성해간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파편들을 독자들의 손에 쥐어주며 새로운 차원의 사색의 세계로 초대한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속에서 발견한 미시의 세계(『꽃의 지혜』)부터 온 삶과 우주를 아우르는 거시의 세계(『지혜와 운명』,『운명의 문 앞에서』)를 넘나들면서 시인의 영혼으로 써 내려간 아름답고도 장대한 사색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어린 시절 우리 곁의 ‘파랑새’를 알려주었던 그는, 파랑새를 찾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아직도 우리 곁에 ‘파랑새’가 있을지 다시 한 번 삶을 돌아보며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해준다.
모리스 마테를링크 선집 3 ― 운명의 문 앞에서
침묵과 불안의 작가 마테를링크의 죽음에 대한 탐구
소멸의 운명 앞에서 삶에 묻다!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제 무엇을 원하는가.
“세포 하나하나에는 그 삶을 보장하는 기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워지지 않을 시간의 흔적, 자국 같은 것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깊이, 그 자체에 대하여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삶에 묻다
마테를링크는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영역까지 넘나들며 사색을 전개했다. 또한 그는 침묵과 죽음, 불안의 극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이런 면모들은 희곡 작품들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를 쏟아낸 선집 『운명의 문 앞에서(Avant le grand silence)』(1934)에도 잘 드러나 있다. 마테를링크는 1885년경 파리에 체류할 때 빌리에 드 릴라당을 만나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를 통해 신비와 운명, 저세상에 눈뜨게 됐다. 1911년 스웨덴 한림원이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할 당시 사무총장은 마테를링크의 문학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올해의 노벨문학상을 모리스 마테를링크 씨에게 수여하면서, 스웨덴 학술원은 먼저 통상적인 문학 형태와는 너무도 다른, 그만의 독창적이고 참신한 작가적 재능에 특히 주목했음을 밝힌다. 그가 지닌 재능의 이상주의적인 특성은 실로 보기 드문 영적인 경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거기서 우러나는 신비스런 힘은 우리 내면의 비밀스런 심금에 더없이 섬세한 울림을 준다. 아직 쉰 살이 채 되지 않은 이 비범한 인물은 자기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고집하며 신비스럽고 심오할 뿐 아니라, 대중적인 호소력까지 갖춘 경이로운 작가임에 틀림없다.”
마테를링크는 삶과 죽음을 시간과 운명을 통해 바라본다.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에게는 곧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삶과 죽음에 대한 미묘한 함수를 시간과 운명이라는 두 축을 통해 담담하게 풀어낸다.
“지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시간 자체는 꿈쩍하지 않습니다. 공간과 영원이 그러하듯 시간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시간은 공간이고 영원입니다.”
“오래 살다 죽는 것과 이른 나이에 죽는 것은 같은 죽음입니다. 둘 다 죽음으로써 잃을 것이 ‘현재’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요, 미래 또한 아직 우리 것이 아닙니다. 소유하지 않은 것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진실에 대한 신념을 품고 있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현상들 너머에 또 다른 본질이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신비를 구성하는 주요 요건이다. 그런 믿음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심오함이란 이곳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어느 별천지가 아니라, 지금 이렇게 너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깊이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임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운명의 문 앞에서』는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안에는 단단히 응축된 사색의 정수가 들어 있다. 신비로운 한 줄 시와 같은 문장들이 담긴 이 선집은 삶과 죽음, 운명에 대해 시공을 초월한 사색의 경지로 우리를 이끈다.
“삶의 고독만큼 죽음의 고독이 외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완전히 소멸하든, 우주로 흩어지든, 영생을 얻어 부활하든, 지금 이 순간 육체를 떠날 준비가 된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책 속에서
◆ 우리가 마음 깊이 사랑한 존재는 누구나 죽어서 신이 되는 법이니까요. -15쪽
◆ 우리는 누구나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한 뒤에야 진정한 죽음의 길로 들어섭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많은 경험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진지하고 훌륭한 경험을 하느냐입니다. -17쪽
◆ 행동하고 사고하기를 멈춰선 안 됩니다. 설사 우리의 능력 밖에 있다는 걸 충분히 알 때라도, 불가해한 그것을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노력해야 합니다. -29쪽
◆ 삶은 왜 삶일까요? 그 밖에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에 삶입니다. 삶은 존재하고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49쪽
◆ 『파랑새』에서 틸틸은 단언합니다, “죽은 사람은 없다”고. 그렇습니다, 죽은 자는 없습니다. 죽은 자는 모두 살아 있고, 산 자는 모두 죽어 있으니까요.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산 자는 죽은 자 속에서 살아 있고 죽은 자는 산 자 속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 불과 며칠의 간격이 있을 뿐이며, 어느 쪽이든 영구적 파괴는 불가능합니다. ‘죽는다는 건 살기를 중단하는 것’, ‘산다는 건 죽기를 중단하는 것’. 그 둘은 서로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금언입니다. -56쪽
◆ 우리가 불어 끈 촛불의 운명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과 영혼, 삶의 깨달음에 첫발을 내딛고 있을 것입니다. -57쪽
◆ 지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시간 자체는 꿈쩍하지 않습니다. 공간과 영원이 그러하듯 시간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시간은 공간이고 영원입니다. -76쪽
◆ 누군가 죽었다고, 죽은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살아 있으나 우리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 정당하고, 진실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산 사람이 그 형체를 바꾸었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81쪽
◆ 세포 하나하나에 그 삶을 보장하는 기억이 새겨 있습니다. 지워지지 않을 시간의 흔적, 자국 같은 것들이. -90쪽
◆ 누구나 어느 정도의 나이에 이르면, 먼저 떠나간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데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삶의 가장 성실한 친구들일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고, 그런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 -96쪽
◆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결코 그러지 못합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려면 스스로에게 자문이라도 해보거나 최소한 자기 몸을 더듬어보기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98쪽
◆ 살아 숨 쉬는 자가 간직한 모든 추억은 그와 더불어 살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추억들이 구성해온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해체되어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면, 그때 그것들은 어디로 갈까요? 주거를 잃은 내 추억의 미립자들은 무엇이 될까요? 무한한 밤의 잔해로 떠돌까요? -101쪽
◆ 아무 희망 없이 끝없는 질문을 늘어놓다가 지쳐, 그만 서둘러 답을 내놓고 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에 의문을 갖는 일에 지쳐선 안 됩니다. -119쪽
◆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은 두 번 죽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보다 가혹한 죽음입니다. 그것은 죽어서 이름 없는 뼈가 되는 사람의 운명과도 같습니다. -148쪽
◆ 죽음에 대해 말해보십시오. 죽음이 그대에게 뭐라고 말 걸고 어떤 일, 무슨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그리하여 그대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럼 나는 당신과 10년을 함께 산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당신의 삶이 어떤지 알아맞힐 수 있으니. -150쪽
◆ 오래 살다 죽는 것과 때 이르게 죽는 것은 같은 죽음입니다. 둘 다 죽음으로써 잃을 것이 ‘현재’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요, 미래 또한 아직 우리 것이 아닙니다. 소유하지 않은 것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152쪽
◆ 삶의 고독만큼 죽음의 고독이 외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158쪽
◆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 우리를 떠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떠나는 것은 삶입니다. 같은 말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후자가 훨씬 명료하고 진실에 더 가깝습니다. 삶이 몸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몸속에서 또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아니, 몸이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159쪽
◆ 죽음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예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사유가 내 안에 빚어놓은 어떤 낯선 존재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167쪽
◆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제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묻는 장엄한 침묵 앞에서 대답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에 대비해 준비해야 합니다. -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