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가 된 독자
책 중독자들을 위하여
“세계 최고의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 신작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독자는
이런 훈계를 한번 이상은 들어 봤을 것이다.
“집에서 책만 읽지 말고,
밖에 나가서 살 궁리를 좀 해라!”
책과 독서에 관한 최고의 지식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알베르토 망구엘이다. 이번에 출간된 《은유가 된 독자》를 보더라도 “언어의 파수꾼”, “책의 수호자”, “세계 최고의 독서가”라는 찬사를 멈추긴 어려워 보인다.
독자에 대한 시선은
어떻게 변해 왔는가
《은유가 된 독자》는 서양문학을 근간으로 독서와 독자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해 왔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이를 위해 망구엘은 서양문학의 원류인 성서에서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대변되는 중세 교부철학, 셰익스피어 문학, 현대문학까지 총망라한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길가메시 서사시》, 단테의 《신곡》, 몽테뉴의 《수상록》, 셰익스피어의 《햄릿》,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 서양문학사에서 내로라하는 작품들과 일별할 기회를 얻는다. 서양문학사 및 문화사에 대한 일가견도 갖게 될 것이다. 《은유가 된 독자》는 한마디로, 기존 문학 작품들을 독서 또는 독자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망구엘은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태도와 행동을 세밀히 분석해 독서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독서와 독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도 설명한다. 문자 문명이 발생한 이래 독자는 지식인으로 추앙을 받다가도 세상일에 무관심한 이기적인 자들이라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기를 반복했다.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그럼에도 인간은 계속 ‘읽어야 하는 존재’
망구엘은 서양문학에서 독자는 크게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로 여겨졌다고 보았다. 《신곡》의 주인공 단테가 대표적인 여행자 유형이다. 그는 지옥, 연옥, 천국을 거쳐 최고천에 이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서를 “텍스트를 독파하는 여행”이라고 했다. 독자는 세상을 여행하듯 텍스트를 여행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과거(읽은 페이지)와 미래(읽을 페이지)를 넘나드는데, 이는 과거의 행적을 돌아보고 미래의 행로를 예견하는 인생길과 같다. 이처럼 ‘독서의 경험’과 ‘삶의 여정에서 겪는 경험’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우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손가락으로 텍스트를 더듬고, 예민해진 몸을 다리로 떠받치고, 의미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한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다. 앞으로 나올 페이지들을 상상하면서 지평선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도착 지점을 예감한다. 이미 읽은 페이지들은 회상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순간과 직면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모든 독자는 안락의자에 앉아, 일렁이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시간의 섬(island of time)으로 간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29, 30쪽에서
은둔자의 대표적 인물은 ‘햄릿’이다. 햄릿은 “질질 끌고, 충동적이고, 명상적이고, 폭력적이고, 철학적이고, 경솔한 인물로,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캐릭터다.” 책을 통해서만 지식을 습득한, 우유부단한 책상물림이다. “책에서 읽은 지혜를 지껄이는 겉멋쟁이” “생각이 지나쳐 불구가 된 남자”가 그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햄릿에게 책은 우주이자 세상에 관한 모든 경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시각엔 햄릿 같은 독자를 ‘비활동적이고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이들이라고 보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다. 훗날 이것은 민중이 지식인을 불신하는 현상으로도 이어졌다.
‘학구적인 지식인의 호젓한 장소’로 통하던 탑이 안식처가 아닌 ‘은신처’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탑이 ‘세상의 의무를 기피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다. 대중은 상아탑을 거리의 삶을 외면하는 피신처로, 그 속에 안주하는 지식인들을 속물, 무기력한 인간, 기피자, 인간 혐오자, 민중의 적으로 여겼다. -93쪽에서
현대에 이르러 ‘대중의 개방된 공간’은 ‘우울한 지식인의 상아탑’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민중은 상아탑을 향해 밀실혐오증을 드러내며 분개하고, 지식인들은 얼굴 없는 대중의 광장을 향해 광장혐오증을 드러내면서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95쪽에서
망구엘은 책벌레 유형으로 보바리 부인과 돈키호테, 안나 카레니나 등을 든다. 여기서 책벌레란 독서를 통해 지혜를 얻지 못하고, 마치 좀벌레가 책을 먹어 치우듯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독자들은 생쥐나 시궁쥐라고 조롱받기도 하는데, 그들에게 책은 영혼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아니라 헛된 욕심을 채우는 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망구엘은 책벌레에 대한 이런 비딱한 시선의 배경에 기독교가 있다고 본다. 유대와 기독교 사회는 늘 ‘말씀에서 창조된 세상’을 지향했고, 이는 지적 행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신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언어의 마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이돼, 텍스트 검열·분서갱유·책벌레 조롱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이 때문에 책벌레, 책바보는 사회가 독자에게 투사하는 부정적 의미들을 모조리 뒤집어썼다. 독자는 “단어의 황무지 속에서 길을 잃고, 매일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실용성이 전혀 없는 상상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피조물”로 전락해 버렸다.
하지만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란 말이 언제나 부정적으로 쓰였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인, 어쩔 수 없이 “독서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어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자아도 확인하게 되는 운명에 처해져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읽는 행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종이책, ‘진지한 독자’는
여전히 유효하다
망구엘은 전자책과 종이책을 비교하면서 현대인에게 뼈아픈 일침도 가한다. 전자책이 전통적 지식 섭취 수단인 종이책을 대체할 경우 나타날 부작용을 우려한다.
지금 우리는 눈앞에 놓인 전자책 단말기 앞에서 모두 획일화되어 있다. 스치듯 넘기는 페이지에는 주석용 여백보다는 다른 페이지나 (시선을 분산시키는) 광고와 연결된 하이퍼링크가 더 가득하다. 주석이 달려 있고 이리저리 뒤적이며 읽어야 하는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에서는 스토리를 물리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을 실감하기가 어렵다. 물론 전자책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유용하지만, 그 서비스들은 다른 한편으로 독자의 재량권을 제한하는 요인이 된다. 사이버 공간에서 여행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제한을 인식하고, 여행의 자유를 누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69, 70쪽에서
망구엘은 현대인의 지향점 없고 즉흥적인 생활 태도를 지적하면서 계획적이고 의미 있는 독서 습관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천천히, 깊게, 철저히 읽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 불가해하듯이, 그렇게 하고도 우리는 텍스트를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서.
책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 전까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양심을 찌른다. 거기까지가 책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대하다고 일컫는 텍스트가 모두 그렇듯, 궁극적 이해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아무도 모르므로, 그곳을 묘사할 단어가 없다. -59쪽에서
소설가 장강명 추천 글
‘진지한 독자’라는 멸종위기종의 일원으로서, 위로받는 기분으로 읽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나의 동족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우리 종족이 어떻게 태어나고 발전했는지 보여 주는 역사서인 동시에, 우리에게 약속된 땅을 보여 주는 복음서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세계가 곧 책이고, 삶과 여행과 독서는 모두 똑같은 정도로 심각하고 위험한 행위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소개로 뜻밖의 유명 인사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이 한 동족임을 왜 미처 몰랐을까. 수백 년이나 우리는 함께했었는데.
아, 그들의 이름은 햄릿, 엠마 보바리, 돈키호테, 안나 카레니나라고 한다.
정말이지 기쁘고 반가웠다. 심지어 그들도 책이라는 무시무시한 덫에 걸려
인생을 망쳤다며 이를 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