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언어
문재인 대통령 최측근 양정철이 말하는
“낮출수록 빛나는 언어의 힘”
★★ 유홍준·유시민·주진우 추천 ★★
언어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노무현의 ‘공감 언어’, 문재인의 ‘소통 언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말과 글이다”
언어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저자 양정철은 언어학자도 사회학자도 정치학자도 아니지만 언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채워야 할 생활 속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민해왔다. 참여정부 5년 내내 국내언론비서관과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냈고,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2017년 정권교체를 이루기까지 말과 글로써 민주의 홍보를 위해 앞장섰다. 오랜 시간 노무현, 문재인 두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오며 양정철은 언어라는 지점에서 두 분과 더 깊게 만난 셈이다.
저자는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진보를 이루려면 국민들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씀을 깊게 새기며, ‘언어’야말로 노무현, 문재인 두 대통령의 가치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중요한 소통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두 대통령 모두 언어를 통해 국민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일을 대단히 중히 여기고, 민주주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말과 글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언어 민주주의’ 관점에서 두 대통령을 이야기하고, 우리 생활 속 언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을 모색해나간다.
《세상을 바꾸는 언어》를 쓰기로 결론 내린 것 역시 노무현, 문재인 두 분 가치를 내 나름 방식으로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두 대통령 모두 조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싸우고 노력해왔다. 두 분은 상당히 다르지만 많이 비슷하다. 그중 하나가 말과 글, 즉 언어를 통해 국민과 소통하는 일을 대단히 중히 여긴다는 점이다. 글 잘 쓰는 참모들을 늘 가까이 두고 싶어 했고, 중요한 소통 수단으로서뿐 아니라 민주주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말과 글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른 일로도 두 분 대통령을 보좌했지만, 언어라는 지점에서 나는 두 분과 더 깊게 만났다. ‘언어 민주주의’ 관점에서 두 분을 얘기하고 싶었고 민주주의를 얘기하고 싶었다. _7~8쪽
지난 세월 나름 투쟁의 언어, 자본의 언어, 권력의 언어를 모두 경험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공감의 언어였다. 이제 나는 권력의 힘, 돈의 힘보다 언어의 힘이 강한 사회를 꿈꾼다. 우리 정치가 언어로 국민과 소통-공감하는 것 말고 다른 수단은 없다. 언어의 힘이야말로 민주주의 저력이다. 전제주의로 상징되는 권력의 힘,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돈의 힘으로 국민 마음을 얻는 시대는 끝났다. (…) 언어의 힘이 강한 사회를 소망하며 기회 닿는 대로 쓰고 말하는 일로 보람을 삼고자 한다. 이 책이 첫 작업이다. _234쪽
왜 ‘언어 민주주의’인가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피어, 벤자민 리 워프 같은 언어학 석학들에 따르면 “언어가 의식과 사고를 지배한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말과 글은 곧 의식의 반영으로, 언어를 통해 그 사회 의식 수준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언어》는 소통의 수단으로서 우리 언어 안에 담긴 문명성과 양식, 이성의 현주소를 다섯 가지 키워드(평등·배려·공존·독립·존중)로 짚어본다. 극단적 이념의 시대에 대결과 배타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공존과 평등, 독립의 언어’는 설 땅이 좁아졌다. 극단적 효율의 시대에 경쟁과 속도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배려와 존중의 언어’도 설 땅이 좁아졌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쓰는 말과 글에 이기적·비인간적·일상적 무례가 꽤나 많아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초단기간에 민주주의를 이룬 탓에 구석구석 빈틈이 많다. 이런 틈을 메우려면 정치와 행정을 통해 민주주의 틀과 구조와 시스템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는 민주주의 완성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 생활 속 작은 일, 작은 생각, 작은 언어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는 생활 속 디테일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배려, 존중, 공존, 평등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가 바로서려면 배려의 언어, 존중의 언어, 공존의 언어, 평등의 언어를 쓰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말씀대로 민주주의는 인류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공존과 배려와 존중과 평등의 가치는 인간이 집단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그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온 존엄한 개념이다. 이제 우리가 그런 가치와 인식과 문화를 언어로 잘 담고 있는지 차분하게 들여다봐도 될 만큼 대한민국은 발전했다. (…) 나는 이 책에서 그저 소박하게, 언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채워야 할 생활 속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독자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는 것만으로 족할 따름이다. 또 민주주의 공화국 한 시민의 책임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민주주의적으로 말하기, 민주주의적으로 글쓰기, 민주주의적으로 소통하기, 이것이 내가 소박하게 생각하는 ‘언어 민주주의’다. _9~10쪽
고성의 나라 대한민국
힘 빼고 말할수록 빛나는 언어의 힘!
한국은 고성 사회다. 방송도, 정치도, 행정도 목소리가 크다. 목소리가 크다고 설득력이 높은 게 아닌데도 우리 사회엔 왜 그렇게 고성이 많은 것일까. 정치의 경우를 봐도 큰 소리로 싸우고 삿대질하고 결국 몸싸움까지 가는 상황을 우리는 종종 목도한다. 방송뉴스도 중요한 사건이나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는 중요 사안을 전할 때는 높은 톤으로 시청자 평정심을 흔드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국내외 사례를 제시하며, 고성방가 수준의 ‘고래고래 연설’ 행태에 대해 꼬집는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 도전했을 당시 기존 유세 방식을 버리고 토크 콘서트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하면서 유권자들과 공감도를 높인 경험을 소개했다. 결과적으로 소리를 높이지 않고 차분하고 낮게 말하면서도 국민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가장 낮고 조용한 소리로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우리의 촛불 문화도 언어 민주화 관점에서 빼놓을 수 없다. 촛불시위의 위대함은 유례없는 ‘평화’, ‘질서’ 등에서도 발현되었지만, ‘침묵의 힘’을 새로운 시위 문화의 본보기로써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크다.
정치 고성은 선거 때 정점에 오른다. 유세야말로 큰 목소리 경연장이다. 가뜩이나 큰 목소리는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동네 구석구석을 시끄럽게 만든다. 선거철만 되면 소음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 정치 민폐다. 데뷔 이후 늘 새로운 정치를 꿈꿨던 문재인 대통령은 첫 총선에서 지역구인 부산 사상을 돌며 시끄러운 유세를 피하고자 무진 애를 썼다. 고성 대신 ‘뚜벅이 유세(유세차 없이 동네를 돌며 유권자들에게 직접 인사하고 스킨십을 갖는, 발로 뛰는 유세)’를 하면서 몸을 낮췄다. 높은 목소리 대신 땀과 진정성으로 호소한 조용한 유세는 성공했다. _55~56
우리 언어에 깊숙이 침투한 일본어
‘언어 민주화’만큼이나 ‘언어 독립’이 필요하다
저자가 일본에서 이 책을 쓰기로 결정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야스쿠니 신사다. 참배하러 간 것이 아니다. 침략의 역사를 상징하는 그곳에서 치욕을 잊지 않고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리 언어에 아직도 짙게 남아 있는 일본어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는 근대문명, 즉 법률·행정·의료·교육·언론·건설·철도 등을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도입하면서 관련 용어도 일본 것을 받아들였다. 저자는 언어 민주주의와 함께 우리 언어의 독립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표적 사례로 한때 논란이 된 ‘각하’와 ‘여사’라는 표현이 그렇다. 대통령 뒤에 각하 호칭을 쓰는 것은 오히려 극심하게 격을 낮추는 꼴이다. 마찬가지로 대통령 부인에게 ‘여사’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역사적 어원을 모르고 사용하는 부적절한 예다. 언론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국어 파괴가 심각한 수준이며, 우리나라 국토 대부분 명칭도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고유 이름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마침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저자는 우리말과 글, 우리 국토의 이름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우리 역사와 조상들의 얼이 담긴 자랑스러운 중요 무형 자산을 지키는 일이라며 언어 민주주의와 함께 언어 독립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백성들은 창씨개명으로 빼앗긴 본래 자기 이름을 모두 되찾았다. 그러나 국토 상당수는 우리 이름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남긴 일본식 지명이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물론 정부나 각 지방자치단체가 일본식 지명을 한꺼번에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 많은 지명을 단번에 바꾸면 예산도 예산이거니와 행정적 혼란이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합리적 방법이 있다. 먼저 어느 지명이 일본 잔재인지 철저히 조사부터 해야 한다. 이후 틈나는 대로, 계기가 생기는 대로 차근차근 바꿔나가는 중장기 목표를 세워야 한다. 새로 지하철역이 생긴다든지, 행정구역이 합쳐지거나 나뉜다든지, 학교가 새로 들어선다든지, 뉴타운을 조성한다든지,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선다든지 할 때마다 이름에 고유 지명을 붙여가는 게 필요하다. 새로 들어서는 지하철역, 학교, 아파트, 신도시 이름에 투기나 집값의 욕망에 따라 갖다 붙이는 국적 불명의 희한한 이름 대신 토박이 이름을 또박또박 부여해나가야 한다. _165~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