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령 - 우리 소설로의 초대 006
숨겨진 상처를 찾아서 떠나는 구도자의 서정
은일하면서도 다채로운 문체가 보여주는 삶의 아슬한 비경
이순원의 소설의 서사의 세계는 매우 다채롭고 공교하다. 내용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히 다양한 프리즘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작가들은 자기만의 특징적인 세계를 특화하여 보여주게 마련인데, 이순원은 그 어떤 세계라도 자기 소설로 만들어내는 장기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집에 묶인 여덟 편의 작품들은 제각각 소고하고 있는 주제가 다르지만 각각 그 주제와 어울리는 소설적 형상화에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의 공간적 현장은 매우 다양한데 군대, 광주항쟁, 민주화투쟁, 노동운동, 동구변화와 소련몰락, 대학생활, 타락한 자본주의의 소비시장 등등으로 우리 현실에서 중요한 문제적 공간은 거의 망라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언제 첨단의 시의성을 포착하여 매우 유의미한 징후들을 의미 있게 탐문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소설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나름대로 실험적인 노력을 계속해 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순원의 소설의 의의는 소통과 서정성 및 비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단히 다양한 레퍼토리와 그에 걸맞는 다종의 기법으로 현실의 많은 국면들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해 왔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독자와의 교감, 즉 문학적 소통에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이며 그에게 현대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준 「은비령」도, 거칠게 말하면 소통의 영원성에 대한 희구를 말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그 여름의 꽃게」같은 작품이 대표적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이 지니고 있는 유년기의 기억 혹은 유년 시절의 꿈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현실적 폭력이기에, 그것은 응당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순원에게 있어서 소설 쓰기란 허구적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유년의 기억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예술적 행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순원 문학은 작가가 비관주의자임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세상을 더럽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청산하고 작가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관주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순원 문학을 이끈다. 하나는 그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현실적일 정도로 과격한 부정의 실현이다.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요소들에 의해 더럽혀져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훼손되지 않은 것들을 찾아 확인하고 그것에 알맞는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다. 그 명명(命名)의 행위는, 아름답기에 연약한 것들 언제 짓눌려 훼손될지 모르는 경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비관주의 위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 간절하다.
- 정호웅 | 문학평론가,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