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 99%보다 잘하는 것 1%에 승부를 걸어라
꼭 성공하고 싶은 당신에게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매달리십시오.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열망이 있다.
서점에 가장 좋은 자리에 진열되어 있는 베스트셀러에서도,
많은 유명인사들의 강의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해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학교를 선택하는 것, 직장을 고르는 일 등에서도 물론 다들 '좋아하기에 택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좋아하더라도 잘하지 못하면 성공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분명 틀리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재능'이다. 재능이란 내 부모가 물려준 것이기도 하고 내가 가지고 태어난 가능성이기도 하다. '잘하는 것(남들과 비교해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란 어느 정도의 재능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반대로 좋아하는 것은 재능이 배제된 즐거움에 불과하다. 내 스스로 기쁘고 행복하고 만족하려고 좋아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나쁜 것이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성공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공하려면 남보다 단 1%라도 잘하는 것에 매달려야 한다. 성공의 승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 또한 화장품, 에스테틱이라는 분야에 발을 내딛기 전 수많은 고민을 했다. 오빠의 말 한마디로 관심을 가지긴 했으나 필요에 의한 시작이었고 내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몸소 그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노래를 좋아한다고 다 가수를 꿈꾼다면 그것이 어떻게 건강한 일이겠는가? 잘 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서 혼신을 다해 매달려야만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전적으로 매달려 일단 성공 가능성을 최대한 높인 뒤에, 좋아하는 것은 그저 취미생활로 삼으면 보다 행복한 인생이 된다.
내 자본 500만 원에서
내 재산 100억 원이 되기까지
나의 성공 공식은 너무도 단순하고 투명하다. 일체의 가식이나 과장, 거품이 없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잃게 되자 내 자본 500만 원으로 한 평짜리 화장품 가게로 시작했지만, 워낙 작은 규모이기에 먹고는 살아도 돈을 모으기는 어려웠다. 나는 과감히 변신을 모색했다. 마침, 여동생이 언니가 걸어간 길을 걷겠다고 하자, 나는 미련 없이 거저 넘겼다. ‘나만 고생하면 되었지, 여동생까지 내가 한 고생을 되풀이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잘 되는데 왜 그냥 넘기느냐? 너무 아깝지 않느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평소의 내 소신대로 거저 넘기기로 했다. 그래서 수유리 가든타워 10평짜리(11층) 가게로 옮기면서도 빛 천만 원을 얻어야 했다. 오피스텔이라서 인테리어 비용은 들지 않았다. 그저 커튼을 치는 정도로 준비를 마쳤다. 세탁기, 냉장고 같은 기본설비는 물론이고 슬리퍼마저도 구입하지 못했다. 나중에 약간 여유가 생겨 슬리퍼를 장만하게 되자 다들 ‘김 원장, 그 동안 부자 됐네.’라며 놀라워할 정도였다. 1992년에 수유리 가든타워 11층에서 빚 천만 원으로 피부 관리실 ‘난(蘭) 코스메틱’을 시작할 때는 내 자본이 제로였다. 그러니 2011년 3억 원 개인소득 신고로 비교해 보았을 때, 10여 년 사이에 말 그대로 강산이 변한 것이고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에 해당됐다.
수유리 가든타워에서 수차례 개업(11층 10평 → 11층 50평 → 2층 240평 → 19층 40평 → 19층 50평)을 되풀이했지만 그래도 폐업까지는 이르지 않고 10여 년을 잘도 버텼다.
그 속에서 쓰디쓴 실패도 경험했고, 달콤한 성공도 맛보았다. 이립(而立)의 서른 살부터 불혹(不惑)의 마흔 살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의 오십 고개를 코앞에 두기까지 수유리 가든타워는 나와 우리 집에 참으로 사연이 많은 곳이었다.
나의 비즈니스우먼 시대는 명확히 둘로 나눌 수 있다. 결혼하며 덤벼든 생활전선이 2004년까지라면 그 이후부터는 백 퍼센트 약손명가와 함께 걸은 걸음이고 같이 달린 마라톤이다. 그래서 2004년 이전의 이야기는 순수한 억척스런 또순이 타입이 전부였다. 약손명가를 만난 2004년, 시작은 모험이고 투기였지만 1년이 지나자 그 모험은 약속이 되고 투기는 신화가 되었다.
1991년부터 2011년까지 내가 낸 소득세만 해도 총 27억 원이며, 그중에서도 2011년 한 해의 소득 신고액이 3억 원이었다.
2012년 첫눈을 바라보며 되돌아보니 80평 아파트에 행복한 가정이 뿌리내려 있고 통장에는 적금에서 열린 결실이 10억에 저축에서 모아진 열매가 2억이었다. 그리고 2009년 5월(가정의 달)에 나는 서울 강남 요지에 독립건물(지하 2층, 지상 5층)을 구입했다. 평가액이 60억이라서 융자 24억(현재는 다 갚은 상대다.)에 내 돈 24억을 합쳐 급매로 나온 건물을 총 48억에 매입했다. 지금은 호가 75억이다. 또한 내 직영 샵이 현재 7개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자본 5백만 원에서 내 재산 100억 원을 만들어 드디어 성공신화를 만들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수유리 가든타워만 놓고 보면 ‘빚 천만 원으로 12년 만에 총재산 100억 원을 만든 셈’이다.
행운은 있었지만 공짜는 없었다. 땀방울은 있었지만 선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어머니로부터 배운 인생살이, 세상살이의 지침들이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녀시절부터 내가 체득하여 체질화한 여러 특질들이 바로 ‘김현숙 표 마케팅’이 되었으며, 내 소신이 곧 ‘난(蘭) 코스메틱’의 사훈(社訓)이 되었다.
8년 전에 약손명가를 시작하면서도 내가 한 평짜리 가게에서 시작하고 수유리 가든타워에서 싹 틔우고 꽃 피운 ‘난(蘭) 코스메틱’을 운영하면서 채운 경험과 연륜이 밑거름이 되었다.
‘책임이 제일 중요하다.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이 약손명가의 책임제 관리로 변했다.
‘내가 한 희생, 내가 겪은 고통은 나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로 같은 희생, 같은 고생을 짐 지울 수 없다.’는 생각이 약손명가에서 열심히 일하면 적어도 10년 안에는 한 샵의 지점을 본인의 이름으로 운영하여 수익금을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뭐든 배워야 한다. 배운 것은 빼앗을 수도 없고 뺏기지도 않는다. 모든 좋은 것은 백 퍼센트 배움에서 나온다.’는 확신에서 약손명가의 철저한 교육제일주의로 뿌리내렸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투명해야 불평불만이 없다. 좋은 일은 무조건 공평하게 나누고 나쁜 일은 무조건 나를 비롯한 책임자가 다 떠맡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약손명가의 직원제일주의가 탄생했고, 약손명가의 일정성과 분배원칙이 둥지를 틀게 되었다. 하루 매출의 목표액을 넘기면 모든 직원들은 1만 원의 수당을 받는다. 미리 세운 월 매출목표를 초과하면 무조건 50만 원의 수당을 지급한다. 그것도 전국의 롯데 백화점 앞에서 만나 ‘수당 50만 원을 일시에 다 소비함으로써’ 초일류 백화점이 지닌 여러 장점들, 여러 노하우들, 여러 특징들을 몸소 다 배워야 한다. 조금이라도 자투리가 남으면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돈을 쓰면 쓴 만큼 배우는 것, 얻는 것이 있다.’는 어머니 말씀이 나의 소녀시절, 나의 처녀시절, 나의 ‘난(蘭) 코스메틱’ 시절을 거쳐 어느덧 약손명가의 특별한 인센티브전략으로 재 탄생 된 것이다.
6년여 근무한 매니저에게 무상으로 샵을 넘기는 것은 직원 사랑의 전형이다. 직원을 딸처럼 여기고 아들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미 남이 아닌데 왜 아깝고 억울하겠는가? 유혹이나 올가미가 절대 아니다. 백 퍼센트 직원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2년 전,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아 약손명가식 골기셀프관리를 출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7만 권 이상이 판매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이야기가 담긴 새 책이 출간될 것이다. 책에서 길을 찾고 일을 얻었는데, 나의 책을 펴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