잽
툭툭, 잽으로 무너뜨린 다음 한 방에 보내는 거다!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캐비닛』, 『설계자들』을 잇는
작가 김언수의 첫 소설집, 『잽』
묘사 대신 얘기체로 속이 꽉 찬 작가 김씨는 어떤 비판에도 끄떡없을 만큼 그 솜씨가 민첩합니다. 팽팽한 얘기를 가감 없이 엮어내고 있는,
빠진 것 하나 없는 얘기체. 비평적 포인트.
_김윤식(문학평론가)
블랙유머, 그 속에서 소설과 삶을 되묻는 김언수식 페이소스의 극점
‘정력보다 정성’ 어린 사내들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펀치, 그 잽!
2006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캐비닛』, 2010년 문학동네 온라인카페 연재 당시, 매회 수백 개의 덧글이 달리며 ‘설거지들’ 열풍을 일으킨 작품 『설계자들』 . 단 두 편의 장편소설로 수많은 독자를 흥분시킨 작가 김언수의 첫 소설집이 나왔다. 2002년 등단했으니 11년 만에 펴내는 것이다. 장편에서 범상치 않은 상상력과 캐릭터 창조로 그만의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리하여 그 판타스틱한 세계를 통해 현실의 통속성을 보여주었다면, 이 책에 묶인 아홉 편의 단편은 삶의 단면을 직접적으로 끌어와 다분히 현실 밀착형의 이야기들로 풀어냈다. ‘이게 사는 건가’라는 농담 섞인 자조가 절로 나오는 ‘웃기고 슬픈’ 편편의 현실. 누가 봐도 ‘루저’인 이들 하나하나를 김언수는 리드미컬한 문체와 특유의 블랙유머, 그리고 페이소스로 살핀다. “자본주의가 선물한 최고의 유산은 바로 불안이에요”(『캐비닛』)라고 이미 고백한 바 있듯, 가감 없는 현실성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 권태와 피로를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은 화자의 나이 순서로 묶여 있다. 모두 남자. 누구 하나 세상의 ‘중심’ 혹은 ‘메인 스트림’인 인물이 없다는 점도 같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고생, 자기가 열고 들어온 금고에 갇힌 금고털이, 꿈도 희망도 없는 단란주점 웨이터, 알코올중독으로 아내와 직장을 잃고 도망친 남자 등. 불안하고 불우하거나, 권태롭고 지루하거나. 이렇듯 별것 없고 통속적인 ‘하류 인생’을 통해 작가는 무엇이 우리 삶을 이다지도 빤하게 만들었는가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가령 「금고를 훔치다」의 경우, 어처구니없이 금고 안에 갇힌 두 금고털이범과 그에 공모한 여자의 이야기로, 이들은 경찰에 잡히기만을 기다리며 금고 안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고, 지루함을 견디다못해 금고 안에서 찾은 ‘금주사위’로 ‘추억의 뱀놀이’까지 한다. 유머러스하고 황당한 설정에 빨려들 듯 읽다보면, 금고 안의 폐쇄성과 이들의 행동이 언뜻 막막한 이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인다.
사실 아무도 금고 밖으로 저 반짝이는 것들을 손에 쥐고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저 보석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고 밖에 놔두면 불안하니까. 불안하니까.
_43쪽, 「금고에 갇히다」에서
사기꾼은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거짓보다 진실에 훨씬 가깝다. 진실에 가까운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에 가려 하고, 자신이 움켜쥘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사기꾼과 손을 잡는다.
_47쪽, 「금고에 갇히다」에서
사실상 금고 안에 갇힌 건 이들만이 아니라, 금고 밖 보석의 주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 물리적 의미의 금고에 갇혔건, 금고를 필요로 하는 불안함에 갇혔건.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냉혹함과 비정함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의존하고 위안을 얻는 것은 결국 또다른 환상이라는 것 또한 씁쓸한 사실이다.
술집에서 동전 던지기 한 번으로 손가락을 자르고, 다음날 죽은 채 발견된 사내. 그 일에 대해 돈 몇 푼을 받고 거짓 증언을 하는 웨이터의 무기력한 이야기(「단발장 스트리트」)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조차 잃어버”리고 고독과 무력함 끝에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의미도 의욕도 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삶(「꽃을 말리는 건, 우리가 하찮아졌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더이상 기대할 것도 없고 그래서 더이상 불안할 것도 없는” ‘시시한 느낌’을 나누며 소파를 나르는 이들의 대화(「소파 이야기」) 모두 너무나 태연하게 현실의 통속성을 그린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현실에 대처하는 자세를 표제작에서 제시한다.
「잽」의 화자 ‘나’는 열일곱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어느 날 수업시간 중에 “창밖에서 돌고 있는 아름다운 회오리바람”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수업중에 이상한 소리를 냈다고 ‘나’의 뺨을 수차례 때리는 윤리 선생. ‘나’는 교칙에 맞서 끝까지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았고, 졸업 때까지 화장실과 운동장을 청소한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 힘이 없는 나, 그 내면의 갈등을 ‘나’가 권투 배우기로 이겨내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권투 도장에서 가르쳐준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잽’.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_25~26쪽, 「잽」에서
독기나 오기를 품지 말 것. 투지란 아주 차갑고 조용하다는 것.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빨리 꺼내온다는 느낌으로”. “상대방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가볍게 가져올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씀. 분노하지 말라는 것.
다른 하나는 ‘홀딩’.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못 되면요?”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
_26쪽, 「잽」에서
‘나’는 3년간 권투를 배운다. 그렇다고 누구와 싸움을 하지도, 선생에게 그 이상 반항하지도 않았다. 묵묵히 화장실과 운동장 청소를 했다. 통속적인 세계에 대한 증오를 발산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가는 법을 터득했으리라. 세계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노출하는 순간까지, 마음속으로 ‘잽’과 ‘홀딩’을 반복하며. 결국 윤리 선생이 ‘나’에게 사과했듯이 말이다. 이는 곧 작가가 삶의 예민한 진실과 마주하는 전략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짜 소설은 탄탄한 풋워크에서부터 시작을 한다. 그리고 강한 상대일수록 내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숨긴 채, 상대의 발에 내 흐름을 맞춘다. 그렇게 내가 몸을 움직이다보면, 언젠가 세계가 저 자신의 허점을 드러내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세상이 지친 기색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슬슬 자신만의 리듬으로 풋워크를 하면서 조금씩 잽을 날릴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소설집을 읽다가 허를 찔리는 순간들은 하나같이 이 소설가가 세상을 향해 재치 있는 잽을 날리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_강동호, 해설 「풋워크의 소설」에서
당신은 어떤가. 툭툭,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