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개미, 내 가여운 개미

개미, 내 가여운 개미

저자
류소영
출판사
작가정신
출판일
2013-10-24
등록일
2014-02-25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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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세상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녀가 내게는 한 마리 개미 같았다.”



삶의 균형을 맞추려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위태로운 이야기



- 류소영 두 번째 소설집『개미, 내 가여운 개미』



아스라이 사라져간 기억에 대한

혹은 유령 같은 ‘희미한’ 사람들에 대한 오늘날의 회상




『개미, 내 가여운 개미』는 작가 류소영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첫 소설집 이후 꼭 12년 만에 출간되는 작품집이다. 『피스타치오를 먹는 여자』는 90년대를 몸소 실감나게 살아온 작가가 쓴, 채 여물지 못한 어중간한 시대인 90년대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직접화법으로 진솔하고 담담하게 그려냈다. 문학평론가 김형중 씨는 “‘90년대에 ‘관한’, 90년대를 누구보다도 실감나게 몸소 살아냈던 작가들이 쓴 소설로 재규정할 때, 류소영으로부터 90년대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류소영의 소설을 ‘부적응자‘의 것이라고 규정했고, ‘부적응자들의 연대’라는 새로운 정치 전략으로 확장한 바 있다.

두 번째 소설집은 여전히 부적응자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오랜 시간이 말해주듯 작가의 시선과 문장은 더욱 내밀해지고 단단해졌다. 부적응자의 연대는 관계에서 소외받은 희미한 사람들의 서글픈 연대 의식으로 첨예화되었고, 유령 같은 존재들을 호출하는 방식은 그로테스크하고 날카롭게 그려져 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소설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다. 개인의 고유성이 상실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류소영은 소외된 개인을 호출하고 다시 복원해내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작가가 보여주는 현실은 아주 담담하지만 보고 있으면 우리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딘가 모르게 우리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표제작「개미, 내 가여운 개미」를 비롯한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과거에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폭식증을 앓고 있는 여성, 큰 체구에 어색한 몸매를 가졌으나 개미처럼 위축된, 신중한 몸가짐을 한 그녀의 흔적을 더듬는「개미, 내 가여운 개미」,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옷차림을 강박적으로 고수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옷 잘 입는 여자」, ‘입안에 빨대 많이 꽂아넣기’ 종목에 출전하는 한 남자에 대한 기록을 담은「기록」, 자신에게 걸려오는 유령 같은 전화의 목소리를 통해 전화번호의 전 주인 ‘강미현’의 정체를 이모저모 추리해가는「기억할 만한 지나침」등 우리의 일상을 류소영 특유의 문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없는 듯하지만 주변에 꼭 하나씩 있는 ‘희미한’ 사람들의 이야기



류소영의 소설집은 낡고 정든 사진첩을 떠올리게 한다. 존재하지만 비존재하는 것들, 사람이면서 동시에 유령인 것들, 과거이지만 곧 현재이기도 한 시간들이 소설집에는 중첩되어 있다. 잃어버린 시간들을 바라보게 될 때의 선연한 느낌, 아련하고 쓸쓸한 잔해의 흔적들이 켜켜이 새겨져 있다. 낡은 사진첩은 감정보관함 같다. 그녀의 소설을 열면 아뜩한 그리움과 고통이 흘러나온다.

류소영의 소설집은 부재로 가득 차있다. 부재의 공간에서 희미한 유령존재가 부유한다. 작가는 인물들을 지우고 흔적만 남겨놓음으로써 역설적으로 텅 빈 공간을 환기하고 그 속으로 우리들의 과거를 호출한다. 유령이지만 정확히 부재하는 것 너머에 자리하는 이상한 흔적들, 스스로 여백을 불러일으키는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서늘한 정적들이 있다. 류소영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부재 속에서 유령을 호출하고 복원해낸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존재 자체가 희미한 유령들 같다. 배운 사람들의 영역, 논리와 속도의 영역, 건설과 파괴의 영역과는 다른 삶의 속도를 살아가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늘 세상 앞에서 이방인이다. 그들에게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현대는 고립되어 있고 희미한 존재들은 그 안에서 부유하며 떠 있다. 작가는 우리가 결코 (소설 속에서라도) 직접 마주친 적 없는 사람, 이후로도 이 세상 사람의 모습으로 볼 일이 없는 사람의 이름 석 자를 공들여 새겨 넣곤 한다.

표제작 「개미, 내 가여운 개미」는 “그녀가 어제 새벽에 죽었다.”라는 어떤 여인의 부음을 알리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소설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화자와 그녀에 얽힌 인연을 들려주면서 그녀의 생전 모습을 세심하게 재구성하는 데 대부분의 분량을 할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가 아니라 그가 회상하는 인물, ‘신주연’이다. 우리가 보는 ‘신주연’의 모습은 화자의 마음속 낡은 사진첩에 끼워진 스냅사진처럼 세월과 망각의 후광을 입고 있다. 과거에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섭식 장애를 앓고 있는 여성, 큰 체구에 어색한 몸매를 가졌으나 개미처럼 위축된, 신중한 몸가짐을 한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를 때 즈음, 우리는 화자처럼 이제 고인이 된 그녀에게 누이 또는 헤어진 연인을 대하듯 빛바랜 연민과 애정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화자가 신주연, 그녀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떠나보낸 대상은, 기실 옛 사람이 된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닮은 결핍을 지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진첩의 첫 장에 곱게 끼워둔 얼굴, 이제는 흔적으로 남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들과 닮은 아픔을 지닌 자신의 얼굴을 본다.







불완전한 사람들의 위태로운 균형 맞추기



이 소설집에는 유독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 사회가 거대한 개미집일 때, 가족은 아주 작은 구성단위이다. 가족이라는 결계가 풀어지면 어떻게 될까? 류소영은 말한다. 껍데기만 남은 가족과 가족에 대한 도리는 오히려 지옥일지도 모른다고. 작가가 바라보는 가족은 그저 남일 뿐, 남보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아니다. 류소영은 익명성, 개인주의, 군중 속의 고독으로 상징되는 현대 사회가 실은 더 무섭고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우리는 다수에 의해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대중이란 옷을 입고 있다. 다수의 힘은 엄청난 것이어서 바깥으로 튕겨질 때 우리는 아웃사이더, 즉 소수자로 전락한다.

소설집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와 가족 내에서 일탈된 부적응자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유행을 따르는 수많은 개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군중 속에서 우리는 희미해진다. 이런 사실을 목도하는 것은 불쾌하지만 서늘한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름으로 개인을 상징하는 시대는 끝나버렸다. 경력이 몇 년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 월급은 얼마인지, 자동차는 몇 cc인지, 집은 몇 평인지, 무엇이든지 숫자로 코드화되는 시대에서 우리는 0과 1로 인수 분해되고 있다. 개인의 고유성이 상실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류소영은 소외된 개인을 호출하고 다시 복원해내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짜증내고 서로 가여워하며 똘똘 뭉쳤다.

그 뭉침은 달리 말해 고립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는 고립을 편안해하고 있었다.




표제작 ?개미, 내 귀여운 개미?의 신주연은 폭식증에 걸린 인물이다. 원인은 개미를 집어먹던 어린 주연을 혐오스럽게 쳐다보던 어머니의 폭력과 ‘더럽다’는 금기의 말 때문이다. 주연의 상처는 어른이 된 후에도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무심한 가족들이야말로 주연의 폭식증을 방치한 가해자들이다. 늘 바깥을 떠돌며 희미한 유령처럼 존재하던 그녀는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녀가 가족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폭식증이 전부일 것이다. 가족 안에서 주연은 인생의 주연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소외된 인물은 ?윤미와 춤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윤미는 가족 내에서도 존재감 없는 아이이다. 자신의 친구와 여동생인 윤미의 소개팅을 주선하려던 오빠는 처음으로 윤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듯 소설 속 인물들은 제각기 희미한 존재로 그려지는데 그들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른바 ‘희미한 얼굴’과 ‘어색한 몸’을 가지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불완전한 이유는 그들이 한가운데 구멍 뚫린 빈 그릇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결핍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이상한 과잉의 순간 역시 갖고 있다. 신주연의 폭식 습관, 윤미의 탈춤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줄곧 “에너지의 균형”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사람은 저마다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내성적인 윤미가 괴상한 몸짓으로 탈춤을 추는 것이나, 주연이 폭식증에 걸린 이유는 내적 균형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남은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의 혐의’에 대해 고민한다.

무엇이 서운했을까, 무엇이 불만이었을까, 이렇게.

모든 관계는 인생을 거추장스럽게 한다.




시어머니인 주복희가 가출을 했다. (?또 밤이 오면?) 며느리인 나는 시어머니의 가출 이유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가출한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된다. 그녀는 시어머니라는 책을 채 탐구도 하지 않은 채 접어버린 것은 아닌지, 서로를 괴롭히던 닦달과 비난과 공격, 그 익숙한 노래들을 탐구하듯 떠올린다. 모든 관계는 인생을 더욱 거추장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일상에 남겨진 그녀는 괴롭다. 일상의 방어기제를 걷고 나와 자신의 결핍을 마주한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을 시작하는 동시에 타인의 결핍에도 눈을 뜨게 된다. 그녀는 처음으로 시어머니의 가출을 통해 주복희라는 개인을 생각해보게 된다. 모순적이게도 가족이 사라지자 비로소 가족이 나타나는 것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은 사회와 가족 내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개인이다.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 속의 하나일 뿐, 개인은 사실 유령처럼 희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유행을 따르는 거예요




윤세연은 유행에 민감한 여자(?옷 잘 입는 여자?)다. 늘 한발 앞서 유행하는 옷을 입는다. 그러나 옷 잘 입는 세연은 일주일쯤만 돋보였다가 가장 평범한 스타일로 잊히는데 모두가 그녀의 스타일을 따라 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모든 것은 곧 유행이 된다. 사랑 없이 결혼 하는 세 쌍의 신혼부부 이야기(?꽃마차는 달려갑니다?)처럼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가족도 유행이 되는 시대이다. 유행은 전염병이다. 유행은 우리의 머리카락과 화장과 옷을 물들인다. 동시에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로 표백되는 중이다. 유행은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그러나 감옥이 되어버린 일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소설집에는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부적응자들의 이야기로 나누어진다.

‘입안에 빨대 많이 꽂아넣기’ 종목에 출전하는 한 남자(?기록?)가 있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가출에 필요한 용돈 마련이다. 백수 인생은 늘 사사건건 엄마의 타박 대상이 되는 법이다. 130여개의 빨대를 입에 꽂아 넣으며 남자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봉착하는데 바로 줄줄 흘러내리는 침이다. 남자는 이런 꼴로 서 있는 것 자체가 거대한 모욕처럼 느껴진다. 남자는 결국 이렇게 자신을 위로한다. “그래,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도, 내 입도, 이 웃긴 대회도, 이 잘난 모멸감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석 달 전 휴대폰 번호를 바꾼 남자에게 자꾸만 강미현이라는 사람을 찾는 연락이 온다(?기억할 만한 지나침?). 강미현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휴대폰 문자서비스에 의해 낱낱이 까발려진다. 잠적해버린 그녀를 대신하는 건 결국 00당, K생명보험, 대리운전, N홈쇼핑, 00투어 등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껍데기뿐인 이름과 텅 빈 기표로 치환된다. 관계를 맺었던 흔적들이 쓰레기처럼 나뒹군다. 남자는 휴대폰이라는 편리하고도 끔찍한 감옥을 통해 ‘현대인은 호출 받지 못함을 끊임없이 호출 받고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린다. 휴대폰은 고립된 사람들을 내밀하게 연결시켜주는 끈이지만 동시에 감옥이다. 남자는 다시 무관심한 군중 속으로, 정다운 감옥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결국 악순환의 굴레 속에서 희미해질 것이다.

류소영의 소설을 읽는 일은 이렇듯 서늘하게 우리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경험이다. 낡은 사진첩을 펼쳐보는 일은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곳에는 이제 우리 곁에 없는, 과거가 되어 버린 사람들의 희미한 모습이 붙박여 있다. 지나가 버린 추억, 젊음, 빛바랜 시간들이 사진첩의 갈피를 넘기는 우리의 마음을 콕콕 찌른다. 이 흔적들마저 없었으면 영원히 잊혔을 형상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자신이 갖게 될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곧 이 사진첩마저 낡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일깨운다. 그래도 현재의 삶 속에서 사라져간 것들을 추억하는 힘으로 인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 아닐까.







주요 내용



물소리

전라북도 J군, 수몰 예정 지역에 동행한 나와 최와 박 교수. 댐이 들어선다는데, 물들기 전에 한 번 보고 싶다던 박 교수. 그는 도대체 왜 이곳으로 오자고 한 것일까. 그들은 사진을 찍듯 눈 속에 마을을 찰칵찰칵 집어넣는다.



개미, 내 가여운 개미

형수와 쌍둥이처럼 닮은 그녀, 신주연은 사돈지간이다. 형의 집에 얹혀살던 나는 그녀를 조금 사랑했던 것도 같다.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그녀에게는 남다른 비밀이 있었다. 폭식증. 남몰래 무엇인가 빠르게 입 속으로 구겨 넣기. 우리가 함께 한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녀는 계속 그런 슬프고 아픈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 그녀가 무언가를 급히 삼키고 있지 않았기를 나는 바란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녀가 내게는 한 마리 개미 같았다.



또 밤이 오면

시어머니 주복희가 가출했다.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더 황당한 며느리의 고충이 시작된다. 며느리는 처음으로 예순 네 살의 한 여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관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만날수록 살가운 관계와 가까이 다가갈수록 몸을 옭아매고, 급기야 살을 파고드는 사슬과도 같은 관계. 그렇다면 그녀와 시어머니는?



옷 잘 입는 여자

윤세연은 옷 잘 입는 여자다. 나와 윤세연은 한 무역업체에 근무한다. 무역업체의 성격상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던 ‘나’는 직장 앞 식당에서 몇 차례 그녀와 대화하다가 그녀의 남다른 패션 감각에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낮밤이 뒤바뀐 이 직장에 다닐 수밖에 없는 내력도 듣는다. 그녀에게 점차 익숙해져가고 그녀를 연민해가던 중, 어느 날 군중 속에서 세연을 발견한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돌아보는 사람마다 세연이었다. 이럴 수가. 그래, 순간 모두 다 그녀, 세연이다.



기록

‘세계 기록의 날’ 행사, 2백만 원의 상금 때문에 출전하게 된 종목은 ‘입 안에 빨대 많이 꽂아넣기’. 평소 입이 유난히 크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나는 스물일곱의 취업 재수생이다. 어머니의 입에서 “나가 뒈져라 이놈아”라는 말을 듣고 가출했다. 백 서른다섯 개의 빨대를 입에 꽂자 극도의 피로감과 알 수 없는 모멸감에 서글퍼진다. 그래, 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도, 내 입도, 이 웃긴 대회도, 이 잘난 모멸감도, 아무 것도, 아니다.



윤미와 춤을

김정현, 너 우리 동생 한번 만나 볼래? 윤수는 친구에게 여동생 윤미를 소개시켜주려고 한다. 늘 없는 듯 있는 윤미, 식구들한테까지 웃기게도 낯을 가리는 윤미, 진지하고 나름대로 조용한 윤미, 친구가 영 없지는 않은지 외출하는 날도 있는 윤미, 저녁 때 쯤 집 앞 중학교에 달리기하러 나가는 윤미, 음... 그런데 뭐랄까, 정확히 어떤 앤지 감이 잡히지 않는단 말야.



꽃마차는 달려갑니다

푸켓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세 커플 무와 뮤, 부와 뷰, 수와 슈. 사랑 없이 결혼에 동참했다. 조악한 조화가 달린 꽃마차는 덜컹거리며 여섯 사람의 다른 표정을 실어 나른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석 달 전 나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었다. 번호를 바꾼 후 강미현이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와 문자 메시지에 두어 달 동안 시달려왔다. 그러다 막상 그녀를 찾지 않으니 더불어 나 역시 급속도로 잊힌 사람이 된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든다. 강미현은 사라졌지만, 그녀는 내게 OO당, K생명보험, 대리운전, N 홈쇼핑, OO투어 등으로 남았다.





작품 해설



류소영의 소설집은 낡고 정든 사진첩을 닮았다. 낡은 사진첩을 펼쳐보는 일은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지나가 버린 추억, 젊음, 빛바랜 시간들이 사진첩의 갈피를 넘기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을 콕콕 찌른다. 이 흔적들마저 없었으면 영원히 잊혔을 형상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자신이 갖게 될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곧 이 사진첩마저 낡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일깨운다. 그래도 현재의 삶 속에서 사라져간 것들을 추억하는 짧은 간격으로 인해 남아있는 것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너나 할 것 없이 텅 빈 채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이들은 이렇게 열심히 흔적을 남기고, 물려주고, 전수받는 ‘평범한 천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리운 이름을 호명하고, 꼼꼼히 내력을 기록하고, 기억을 보존하는, 불완전한 인간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토록 마음을 사로잡는 연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이소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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