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
왕은 스스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사를 말할 때 흔히 우리는 왕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며, 왕의 성공 사례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왕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다가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한 사례도 찾을 수 있다. 왕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경우도 드물겠지만, 참모 없이 제대로 정책을 펼친 왕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왕은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는 저자 이덕일이 이번에는 권력의 2인자, 왕을 만든 사람들을 재조명했다. 김유신부터 홍국영까지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꿰뚫은 킹메이커들을 살펴보면서, 시대의 변화를 이끈 핵심 코드가 무엇인지 하나씩 밝히고 있으며, 한 시대의 권력은 단지 군주의 선택과 결정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저자 특유의 이야기처럼 읽히는 문체와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서술한 시대상황은 각 인물의 삶을 좀더 입체감 있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군주사 중심으로 보는 한국사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한국사 전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왕은 하늘이 내린 운을 타고나지만, 참모는 오직 자신의 신념과 능력으로 스스로 운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도 이는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한 조직의 리더는 개인을 돌보지 않는다. 이런 냉혹한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조직에서 살아남을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왕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교훈적이며 귀감이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역사학자 이덕일, 한국사를 참모사의 관점으로 재조명하다!
진나라 멸망 이후 초나라의 항우는 개인적인 역량과 집안 배경, 군사적 능력 등 모든 면에서 그의 라이벌인 유방보다 앞섰지만, 결국 천하를 재패하지 못했다. 유방을 제거해야 한다는 범증의 말을 듣지 않고 기회를 놓쳤다가 끝내 패하고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반면 유방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았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나라를 세웠다. 유방이 항우보다 뛰어났던 점은 참모 영입과 그 활용 능력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이 하나의 차이로 천하의 패자가 뒤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그만큼 참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한국사에서도 참모들이 왕 또는 권력자를 도와 새 국가를 세우거나 정책을 통해 시대를 변화시킨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참모는 군주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존재이지만, 때로 권력자가 자신보다 부족한 듯 여겨 그의 역할을 넘어서는 순간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에 착안하여 한국사를 참모사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을 오랫동안 구상해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게 왕을 만든 킹메이커와 정책으로 보좌한 참모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킹메이커는 단순히 왕을 도와 개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뿐 아니라 왕을 낳은 여인들, 자신의 능력으로 왕을 만들었던 사람까지 좀더 넓은 의미에서 접근하고 있다. 한편 민생을 안정시키거나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때론 국가의 흥망을 걸고 좋은 정책으로 왕을 도운 사람들, 실력과 노력으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 등은 참모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밖에 킹메이커와 참모의 역할은 했지만, 비전을 잃고 권력만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역을 넘어섰다가 비극을 맞은 인물들까지 다루면서 성공 사례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시사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꿰뚫은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왕을 만든 인물 14인을 한 명씩 살펴보면서 그들의 활약 외에도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인생의 비전과 방향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핵심 코드 또한 함께 읽을 수 있다.
삼국통일이라는 ‘어젠다’로 신라를 이끈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으로 신라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비주류였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몰락한 왕족 출신 김춘추를 왕으로 만드는 길을 택하면서 그는 주류사회를 뒤엎을 기회를 잡았고, 통일신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궁예의 일개 신하에 불과했던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네 명의 공신(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홍유)은 고려 건국 후에도 ‘헌신’으로 왕을 지켰다. 논공행상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그들은 후에 태조 왕건의 묘에 배향되는 드문 기록을 남겼다.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온조를 백제의 왕으로 만든 소서노는 넓은 ‘시야’를 가진 지혜로운 여인으로, 기존의 기득권에 안주해 현실을 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본 좋은 사례다.
한국사에서 군주와 참모가 동등한 위치에 서서 건국을 시도한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정도전은 혁명 ‘사상’으로 이성계를 왕으로 이끈 참모였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이성계를 개국 군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인재 발탁에 힘쓴 왕을 만나 ‘시운’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었던 황희는 마지막 생까지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하지만 보통의 군주를 만나 자신의 정치 인생을 모두 ‘정책’을 실현하는 데 힘을 쏟은 김육과 같은 참모도 있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새롭게 재평가된 인물이기도 하다. 미천한 신분에도 오직 ‘실력’ 하나로 판서 자리까지 오른 박자청은 뛰어난 토목건축 능력을 발휘해 경회루, 살곶이 다리 등 현존하는 조선 도읍의 유물을 직접 만들었으며, 늘 성실하여 왕의 신임을 오랫동안 얻을 수 있었다.
나라가 위험에 처한 격변기에는 때로 ‘악역’을 맡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강홍립은 명과 후금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조선이 지원 요청을 받고 명에 보낸 조명군의 수장이었다. 그러나 후금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항복하고 화의를 도모했으며, 이를 위해 긴 억류 생활을 견뎌야했지만 사대주의자의 반대에 그 공을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다. 천추태후 또한 전통적인 ‘기상’으로 사대주의적 유교 정치를 없애고 아들 목종을 왕에 옹립한 뒤 섭정하려 계획하다 쿠데타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악녀라고 폄훼되었다.
인수대비는 권력을 향한 ‘맹목’이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군주를 보좌해 왕위에 올렸지만, 결국 욕심이 지나쳐 왕의 ‘역린’을 건드린 홍국영은 군주의 신임을 역으로 이용해 대의가 아닌 자신의 이익과 미래를 추구하다 귀양 생활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 역사 속에 답이 있다!
시시각각 현재의 변화를 추구하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걱정하는 현대인들이 지금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한 해답으로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역사는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자, 앞선 수레바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심이나 오만에 눈이 멀어 거꾸러진 역사를 다시 재현하는 오류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는 자신은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늘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며, 지난 과거의 허물을 겸허하게 성찰하는 자만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겸손과 성찰을 겸비한 사람에게만 역사는 미래의 문을 살짝 열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다룬 인물들 또한 왕을 만들어 시대를 움직이려는 시도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각각 경험했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왕을 선택하거나 권력을 손에 쥐어야 했던 그들의 시도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현재 내가 속해 있는 조직 또는 사회의 권력 피라미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갈등하는 현대인의 초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1인자가 아닌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시도하고 선택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바로 역사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