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주식동원酒食同源, 주약동원酒藥同源?
국상 중에 술을 마셔 파면된 관리들,
임금에게 술 마시라고 강권하는 신하들,
소주에 산초를 타서 마신 세자의 스승,
술에 취하여 임금을 ‘너’라고 부른 정승까지……
조선 시대의 천태만상 음주 풍습을 들여다보다!
술 마시기를 늘 하지 말고,
덕으로써 몸을 가지도록 하라.
어찌 해로우랴 말하지 말라.
그 해로움이 날로 심해지리라. - 숙종
요절한 왕자들, 임금의 옥좌에 올라간 관리, 임금의 명을 잊은 내시, 왕이 부탁한 점을 무시한 점쟁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재상 등의 공통점은 모두 술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임금들이 내린 금주령은 여러 제약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한양에 크고 작은 술집이 가득 차고 넘쳤고, 어떤 이는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술 마시기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술 문화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점잖고 엄숙한 유교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술은 만악의 근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력 사건의 대부분은 술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는 조선 시대를 살다간 선조들의 음주 실태를 살펴봄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술의 해악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기본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이며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조선의 국왕과 술의 관계를, 제2부는 조선 시대 대표적 주당들의 행태와 술의 폐해를 살펴보았다.
조선의 국왕과 술
조선 시대에는 대궐에서 아침에 열리는 조회를 마치고 나면 국왕이 수고한 신하들에게 술을 내려 위로의 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국왕은 신하들만이 아니라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죄수들에게 술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술을 내려 주는 것은 국왕의 중요한 통치 행위의 하나였다. 술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조선의 왕들 중 술을 좋아한 애주가를 꼽는다면 태종, 세조 ,영조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술을 자주 마시다 보니 자연히 주량도 강했다. 아무래도 즉위 전이나 재위 중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왕들이 술을 좋아했다. 태종은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잔의 아픔을 겪었고,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조카를 몰아냈다.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고초를 겪었고, 재위 중에도 소론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 등의 변란과 치열한 당쟁을 치러야 했다. 임금의 주량은 당대의 정국 동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반대로 술을 가장 싫어했던 왕은 아마 세종일 것이다. 그는 본래 주량이 약하여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왕인 태종과 신하들이 술을 강권하는 바람에 거절하느라 큰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식동원酒食同源, 주약동원酒藥同源
조선 시대에 술은 바로 약이요, 음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허약할 때 약으로 술을 마시거나, 약을 먹을 때 술을 함께 마셨다. 술은 곧 약주藥酒요, 음주는 복약服藥, 즉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에 자주 쓰인 주식酒食이라는 말도 술이 일종의 음식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준다. 술과 약, 술과 밥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처럼 주식동원酒食同源이자 주약동원酒藥同源이었다.
조선인들에게 술은 몸이 좋지 않을 때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먹는 약이요, 약을 먹을 때도 반드시 같이 마셔야 하는 일종의 음식이었다. 술은 오곡의 정기가 들어 있으므로 적당하게만 마시면 참으로 좋은 약이었다. 신하들은 임금이 매일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술을 드시라고 강권하였다. 술을 즐기는 임금들에게는 괜찮았겠지만, 세종처럼 술을 싫어한 임금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그렇다 보니 조선 시대에는 고위 관료들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술을 마시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술을 숭상한다는 의미의 숭음崇飮이라고까지 일컬었다. 숭음 풍조는 건국 직후부터 나타나 나라의 큰 문제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숭음 풍조가 더욱 확산되어 신분이나 지역을 막론하고 음주가 거의 생활화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한양 도성 안에 큰 술집이 골목에 꽉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대어 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미친 듯이 오로지 음주만 일삼고 있다는 개탄이 나올 정도였다.
금주령의 허와 실
나라에서는 수시로 금주령을 내려서 술을 마시는 자와 빚는 자들을 엄히 단속하고자 했다. 금주령을 어겨 체포되거나 처벌받는 자들은 대부분 힘없는 백성이었다. 현장에서 집행하는 하급 관리들은 고위 관료들과 권세가들은 건드리지 못하거나 눈감아 주고 일반 백성들만 엄하게 단속하였다. 단속을 기화로 뇌물을 챙기는 일도 있었다.
금주령을 내리면서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병행하기도 했다. 집에서 마시는 술은 단속이 어렵자 대신 밖에서 술병을 가지고 다니며 마시는 것을 막아 보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물론 혼인, 장례, 제사 때와 노병老病에 약으로 마시거나 활쏘기를 할 때는 술병을 지니는 것이 허용되었다.
금주령은 조선 초기부터 시행했으나 예외 조항이 많아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우선 임금이 베푸는 연회, 종묘 등에서의 국가 제사, 외국 사신 접대 때는 금주령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했다. 늙고 병들어서 약으로 먹는 경우, 친지를 영접하고 환송하는 경우, 과거 합격자의 유가遊街 시에도 예외적으로 술을 허용하였다. 집안의 혼인, 장례, 제사, 환갑 등의 행사에도 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구나 솔선수범해야 할 관료와 양반들이 잘 지키지 않았다. 금주령이 뜻대로 되지 않자 조선 후기에는 위반자를 처형하기도 하고, 단지 술에 만취하여 주정하는 짓만을 금지하는 선으로 후퇴한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금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각종 폐해가 잇따르자 임금들은 계주교서戒酒敎書 등을 내려 술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지나친 음주를 훈계하고 경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이 가장 적극적으로 술을 경계하였고, 선조와 영조 등의 왕들도 음주를 삼가라는 교서를 잇달아 반포하였다. 임금들에 의하면 술은 재물을 허비하고, 인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명을 잃게 하고, 가정과 나라를 멸망시키는 원흉이었다. 특히 영조는 술이 사람을 미치게 하고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 각종 범죄에 빠져들게 하는 광약狂藥이라고까지 하면서 술을 함부로 마시지 말고 절주하라고 당부하였다.
조선의 술꾼들
세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허지, 병조 참판을 역임한 우승범, 세조 시절 좌의정이었던 이사철은 술이 무척 센 두주불사의 관료들이었다. 세조의 공신인 홍달손도 술을 매우 좋아한 대신이었다.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윤회는 세종이 술을 자제하라고 여러 번 당부하였으나 끝내 술을 끊지 못하였다. 태조의 우대를 받았던 재상인 홍영통은 태조의 탄신일 잔치에서 만취하여 집에 돌아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모셨던 한형길은 소주가 싱겁다며 독한 산초를 타서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영의정까지 오른 정인지는 술을 마시고 임금을 ‘너’라고 부른 적도 있다. 세조 8년에는 영의정 정창손이 어전에서 술을 마시고 실수하여 임금이 선위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예조 정랑 우계번이 술을 마시고 취하여 양반 부인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사헌부 관리인 이예는 술이 취하여 무엄하게도 임금이 앉는 평상에 올라가 술주정을 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무장인 어유소는 성균관에서 공자에게 지낸 제사 후 음복을 하고 취해 궁녀를 희롱하면서 술을 따르도록 하였다. 사헌부에서 처벌을 주청하였으나, 임금은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취중에 한 일이라면서 특별히 용서하여 주었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시 중에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시 최습은 술에 취하여 승정원에 전할 임금의 교지를 잃어버렸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내시 박인손은 대궐 밖으로 임금의 심부름을 갔다가 술에 취하여 곧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결국 곤장 60대를 맞아야 했다.
임금을 비방했다가 참형에 처해질 뻔했던 안동 부사 이전, 정승 조준을 저주했다가 참형을 당한 사헌부 감찰 김부도 술이 원인을 제공하였다. 세종 때의 이조 판서 홍여방은 동료 판서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과음하여 이튿날 갑자기 죽고 말았다. 효종 때의 병조 판서 박서는 연일 과음하다가 급사하였다. 개국 공신으로 오랜 기간 도승지로 재임한 박석명은 술병이 들어 36세에 요절하였다. 명재상 하윤의 아들인 하구도 술병이 걸려 37세에 죽었으며, 성종 때에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최경지도 술병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사망하였다.
조선 시대의 주폭과 벌주 풍습
조선 시대에도 주폭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건국 직후에 안말건이 술에 취하여 거리에서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말리는 사람을 구타하였다. 그는 곤장을 맞고 수군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자기 할머니의 상중에 풍악을 울리며 술을 마시고 남의 집에 들어가 행패를 부린 최선, 최굉 형제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성종 때는 그야말로 주폭 삼 형제라고 할 이들이 나타나 갖은 행패를 부렸다. 평양에 살던 생원 김하, 김거, 김석 삼 형제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함께 이모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이웃집의 여종을 불러다가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를 시키며 희롱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제지하고 항의하는 여종의 남편을 심하게 때렸고, 남편의 여동생도 구타하여 업고 있던 아이를 죽게 만들기까지 하였다. 사헌부에서는 김거를 주범으로 보아 교수형에, 김하와 김석은 거든 자라 하여 곤장 1백 대에 해당한다고 결정하였으나, 이미 모두 도망쳐 처벌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영구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처분을 내렸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으로 귀화하거나 귀순한 여진인, 즉 야인野人들을 위무하기 위해 재물을 넉넉하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선지 밤낮으로 모여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는 야인들이 많았다. 여진인만이 아니라 조선에 오는 일본인들도 술을 많이 마시고 술주정을 하는 폐해를 끼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무언가 잘못을 하면 벌로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 벌주 풍습이 널리 행해졌다. 왕실에서도 널리 행해져서 태조가 태종에게 벌주를 내린 적도 있고, 세조가 어떤 일을 자책하며 스스로 벌주를 마시려고 한 일도 있다. 세조는 신하들에게도 벌주를 자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전기에는 새로 임명된 육조의 정랑과 좌랑에게 선임자들이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맡겼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술을 큰 잔으로 두세 잔 마시게 하는 벌주 풍습이 있었다. 만약 끝까지 사양하면 배척하여 동렬에 끼어 주지 않았다. 조광조와 함께 대표적인 사림파인 김식은 벌주를 무척 싫어한 인물이었다. 그는 벌주를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일이 있다.
술을 멀리한 사람들
사실 술을 싫어하고 멀리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개국 직후 태조의 우대를 받았던 조운흘은 세상일에 아무런 욕심 없이 초연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고려 말에 전법총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경상도 상주의 노음산 아래에 살면서 일부러 미친 척하기도 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그러면서 술과 풍악을 멀리하고 세속을 희롱하며 고고하게 살았다.
단종 때의 재상 최부는 사람됨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맑아서 음주와 장기, 바둑을 좋아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예문관 대제학이었던 윤형은 성격이 온순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음악과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이 가진 술을 보면 반드시 “이름을 더럽히고 일을 망치는 것으로는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면서 음주를 경계하였다.
세조 때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박중손은 스스로 계주명戒酒銘을 지어서 자신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세조 6년에 중추원사로 있다가 죽은 기건은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곧았으며,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특히 지방 수령으로 부임한 뒤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술을 마시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인 청백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