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학교의 슬픔

학교의 슬픔

저자
다니엘 페낙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14-07-01
등록일
2014-11-26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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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어느 열등생의 자전적 에세이
프랑스 르노도상 수상작
“슬픔은 배움을 가로막는 벽이다.”

사랑하는 엄마,
나도 성적표를 봤어요. 나도 속상하고, 지귿지귿해요. 잘한다고 미덧던 수학에서 1점을 받으려고 두 시간을 쉬지 안코 숙제를 햇스니 생각해보면 실망할 만하죠. (…)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에는 머리가 조치 안코 열심히 하지도 않아요. 공부가 재미없어요. 책들 속에 갇친 채 머리를 붇잡아놀 수가 없어요. 영어와 수학은 잼병이고 철자법은 엉망인걸요. _본문 48~49쪽
열등생과 부모와 선생 들이 공유한 고통,
학교가 빚어낸 그 슬픔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찰
때로 열등생의 상태가 치유되었다 해도,
그때 받은 상처는 결코 완전히 아물지 않는다.
마르셀 파뇰을 연상시킨다는 찬사를 받으며 2007년 르노도상을 수상한 『학교의 슬픔』은 열등생의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과 오랜 교사생활에 대한 회상이 담긴 작가 다니엘 페낙의 자전적 에세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다니엘 페낙은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작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어릴 적에는 “알파벳 a 하나를 깨치는 데 일 년이나 걸렸던” 열등생이었다. 혼자만 이해하지 못하는 고독 속에 살아가던 그는 그러나, 자신과 닮은 수많은 열등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현재는 작가로서 집필에 헌신하고 있지만 다니엘 페낙은 교편을 잡았던 25년의 세월과 2,500여 명의 제자들, 그리고 자신에게 뿌리박힌 열등생의 고통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열등생과 그들의 부모들과 교사들이 느끼는 심정적 고통, 오늘날 학교의 현주소를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과 따뜻한 시선으로 고찰해나간다. <라 크루아>와의 인터뷰에서 작가 자신이 이야기했듯 『학교의 슬픔』은 “학교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라 열등생의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에세이,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고 영원한 현재에 갇히는 열등생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학교에 관한 책이 또하나 나오는 거네? 그런 책은 꽤 많지 않아?”
“학교에 관한 책이 아냐! 모두들 학교를 다루고 있고, 신구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어. 학교의 프로그램, 학교의 사회적인 역할, 그 궁극적인 목표, 과거의 학교와 오늘의 학교…… 그런데 열등생에 관한 책은 없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로부터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을 다루는 책……”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 _본문 22~23쪽
패거리를 꿈꾸던 어느 고독한 열등생의 이야기
a 한 글자에 일 년,
내 무지의 사막은 넘어설 수 없는 b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다니엘 페낙의 어머니가 작가 다니엘 페낙을 조명한 프랑스 아르테 방송의 영상물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어머니는 세계적인 작가가 된 다니엘 페낙의 ‘성공의 징표’를 보면서도 환갑이 다 된 아들에게서 걱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쟤가 언젠가는 궁지에서 헤어날까?”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아들의 학창 시절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근심이 여전히 유령처럼 출몰한다. 교양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사 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다니엘 페낙은 ‘지부티의 시립 쓰레기통’에 빠졌던 일 외에는 어디서도 자신의 열등함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날마다 학교에서 들볶이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내 공책에는 선생님들의 꾸지람이 적혀 있었다. 반에서 꼴찌가 아닐 때는 꼴찌 바로 앞이었다. (축배를 들어야 할 일이었다!) 처음엔 계산, 그다음엔 수학에서 꽉 막혔고, 심각한 철자 습득 장애에다, 역사의 연대 암기와 지리의 장소 파악에도 먹통이었고, 외국어 습득 불능에다 (수업은 듣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음악이나 체육 혹은 그 외의 어떤 과목으로도 벌충하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_본문 16쪽
여느 열등생처럼 다니엘 페낙은 해야 할 일을 결코 해내지 못하는 수치심과 혼자만 이해하지 못하는 고독 속에 살았다. 하지 못한 학교 숙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래, 오늘은 잘 지냈니?”라고 묻는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며 엄청난 지적 에너지를 사용해야 했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자신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부모와 직업적 실패로 여기는 선생 사이에서 점점 거부와 배척의 행위로 들어가게 된다. 다니엘 페낙 역시 “학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패거리”를 꿈꾸며 어른들에게 복수를 계획하면서, 동시에 어른들의 호의적인 시선을 갈구했다. 결국 그는 중1 때 자신에게 형편없는 받아쓰기 점수를 주던 선생님의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님의 금고에 손을 댔다가 학창 시절 대부분을 기숙사에서 보내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금고털이범은 기숙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학교와 집을 오가며 부모와 선생에게 거짓말을 반복해야 하는 고통에서 해방되고 책을 읽는 취미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그들은 “선생님이 그랬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안다. 열등생이 지루한 푸념 속에 들어앉히는 희망, 그래 그거다…… 선생님의 말이란 급물살을 타고 추락하는 강물 위에서 공부 못하는 학생이 붙잡고 매달리는 부표일 뿐이다. 열등생은 선생님이 한 말을 반복한다. 의미가 있어서도 아니고, 규칙을 구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순간적으로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놓여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아니면 사랑받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_본문 22쪽
미래 없는 삶과 뭔가가 된다는 것
다니엘 페낙은 1969년부터 25년간 2,500여 명의 학생들을 교단에서 가르쳤다. 열등생이었던 자신의 경험이 교편을 잡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페낙은 교직에 있는 동안 매년 3월부터 자식들 때문에 근심하는 어머니들의 전화를 받았다.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머니들, 그들의 거대한 공포는 미래를 “희망 없는 현재의 이미지가 터무니없이 비대하게 투영된 벽”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한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어른들의 미래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으며 어른들이 머릿속에 집어넣은 슬픔을 미리 겪는다. 아이들은 자신의 앞날 없는 삶을 철석같이 믿으며 현재 모습 그대로 미래에도 똑같이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자신은 뭔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니엘 페낙은 열등생을 여러 가지 감정의 껍질로 이루어진 양파로 비유했다. 그에게 선생이란 학생들이 두른 껍질을 벗겨주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시선, 호의적인 말 한마디, 믿음직한 어른의 말 한마디, 분명하고 안정적인 그 한마디”로 자신이 가르치는 수업 시간에, 자신의 과목 안에서 학생들이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양파’는 교실을 나서는 순간 다시 겹을 두를 테지만 “당연히 내일 또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페낙이 생각하는 ‘가르침’이다.
지금 여기서 함께하는 배움
다니엘 페낙은 “문법으로 생긴 병은 문법으로 치유하고, 철자법의 오류는 철자법 연습으로, 책 읽기의 두려움은 책 읽기로” 치유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스스로 제대로 된 답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움츠러드는 아이들을 치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금 여기 이 교실의 수업 시간에 있다고 말한다. ‘학교의 슬픔’은 수업 시간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니엘 페낙은 오십오 분의 문법 시간 동안 문법적으로 학생들이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왔다. 학생들에게 “언어와의 완전한 만남”인 ‘딕테(받아쓰기)’를 하게 했고, 일 년 내내 일주일에 하나씩 꾸준히 문학 텍스트를 암송하도록 했다. 그는 기계적인 훈련처럼 인식되는 문학 텍스트 암송을 학생들이 언어 속에 잠겨들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수업 시간에 “마술적 사고”에 맞서 싸웠다. 미래를 포기하고 동화에서처럼 영원한 현재에 가두어놓는 마술적 사고에서 학생들이 벗어나도록, “세상 누구도 무능함의 사과를 영원히 깨물고 있진 않”도록 그는 수업 시간마다 “기상 시간”을 울려주었다. 그러나 그 역시 기계적으로 의무적인 관람을 안내하는 “박물관 안내원”처럼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 역시 자신 안에서,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책임을 전가하는 “국가교육”의 모습을 본다.
소비지상주의가 뒤덮은 21세기의 학교와 ‘아이 고객’
페낙의 날카로운 시선은 21세기 학교의 달라진 상황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페낙이 학생이었을 때나 교직에 있었을 때와는 달리, 그사이 이민 인구가 많이 유입되었고 소비지상주의가 자리잡았다. 21세기의 열등생은 그전의 열등생과는 다른 특징을 갖는다. 바로 그들 중 많은 수가 이민자 자녀 출신이고 도시 외곽 집단주택단지인 시테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 폭력이 이민자의 유입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페낙은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위험에 처한 지역의 모든 청소년을 이런 극단적인 폭력의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일을 거부하며,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선전이 새로운 선거철마다 쑤셔대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증오한다. 버려질 대로 버려진 청소년을 국민적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환상의 대상으로 만드는 인간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부성父性의 감정까지 잃어버린, 명예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회의 찌꺼기다. _본문 309쪽
현재는 학교마저도 소비지상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바야흐로 세계는 “아무런 벽도, 경계도, 국경도 없고, 소비라는 목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상품 판매장”이 된 것이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떤 미래도 보장해주지 않으면서, 현재를 소멸시켜버리는 오락기기 같은 기계들로 넘쳐나는 시대다. 페낙은 청소년들이 더욱 쉽게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현실에서 이탈시켜 ‘비만한’ 젊은이로 만들어내려는 사회의 이상적인 먹잇감이 된다. 교사는 이런 때일수록 의무를 다해 아이들이 피상적인 욕망이 아닌, 본질적인 배움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페낙은 강조한다.
‘날개가 부러진 제비떼’를 위한 사랑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는 데는 단 한 분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이 책을 쓰는 데 4년이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다니엘 페낙’다운 유쾌한 글로 보이겠지만, 아닙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난날,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던 수업과 해내지 못한 숙제가 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기분 좋은 산책이 아니었습니다.”
_<라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열등생이었던 다니엘 페낙이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덕분이었다. 알파벳 a 한 글자를 배우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린 그의 곁에는 “걱정할 거 없어. 어쨌거나 이십육 년 뒤면 알파벳은 완벽하게 알게 되겠지”라며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셨던 아버지가 계셨다. 스스로 열등하다 여기며 조개처럼 움츠러드는 그의 삶에 혁명을 일으킨 첫사랑과, 바칼로레아에 실패할 때마다 그를 멋진 식당에 초대해 “넌 그저 꽃피는 시기가 좀 늦는 것뿐”이라며 격려하던 오랜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그를 구원해준 스승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교육학적 이론도 심리학적 지식도 내걸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즐거움으로, 페낙이 뭔가 되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모든 점을 잘 따져보면 이 세 분의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철자법의 결함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 선생님은 내게 얼마나 여러 번 논술문을 다시 쓰게 했던가? 발 선생님은 내가 복도에 멍하니 있거나 자습실에서 몽상에 잠겨 있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여러 번 보충수업을 시켰던가?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 한 십오 분만 더 수학을 해보면 어떨까, 페나키오니? 자, 십오 분만 해보자……”)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그 몸짓의 이미지, 자살하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 위로 나를 끌어올리려는 그 손목, 내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살아 있는 손의 생생한 이미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맨 처음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들의 현존 안에서?그들의 과목 안에서?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떴다. 수학자인 나, 역사가인 나, 철학자인 나로. 그러한 나는 이 스승들을 만날 때까지 진정으로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방해했던 나를 한 시간 동안 잠시 잊고, 나를 괄호 속에 집어넣고, 나로부터 나를 치워버렸다. _본문 323~324쪽
우리는 뭔가가 되어간다.
살아가는 한 모두 뭔가가 되고,
때로는 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이 되어 서로 마주친다.

다니엘 페낙은 ‘원죄의 현장’으로 돌아가 스승들이 행한 교육법을 자신의 어린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교단을 벗어나 작가가 된 그는 뭔가가 된 학생들을 마주하면서 “우리 삶이 구름의 형태처럼,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풀려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가는 『학교의 슬픔』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성적표와 철자법 틀린 편지를 보며 어머니의 근심을 이해하고, 1969년 9월 처음 부임한 학교로 아버지가 보낸 편지 봉투에 적힌 ‘페나키오니 선생님’이란 글자 속에서 아버지의 기쁨의 환호성과 안도의 한숨을 들었다고 술회한다. 작가의 자전적 기억과 내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학교의 슬픔』은 도덕적 교훈이나 마법 같은 요령을 가르쳐주기 위해, 학교를 문제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그는 다만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학교에서의 실패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열정적인 스승뿐이라는 것을.
나를 구해냈던-그리고 나를 교사로 만들었던-선생님들은 그 일을 위해 양성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무능한 학교생활의 기원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았다. 원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거니와 나에게 설교를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위기에 빠진 청소년을 마주한 어른이었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던졌다. 그들은 나를 놓쳤다. 하지만 매일같이 다시 몸을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거기서 건져냈다. 나와 더불어 다른 많은 아이도 건져냈다. 말 그대로 우리를 낚아올린 것이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 _본문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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