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려 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이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부드럽되 힘이 있고 위트 있되 진지한 노수필가의 인문 에세이
일본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알기 쉬우면서도 논리적인 글쓰기를 개척한 에세이스트로도 유명한 도야마 시게히코 교수가 기억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망각에 대한 25가지 사색을 전한다. ‘망각론’의 전문가인 그는 기억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에서 시작해, 망각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망각의 가치와 효용성에 대해 부드럽되 힘이 있고, 위트 넘치되 진지한 이야기를 전한다.
“인간은 늘 지식과 감정, 욕망,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다. 이런 얽매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끊임없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끊임없이 발목을 잡는 과거의 기억, 불쑥불쑥 차오르는 부정적인 감정, 그리고 아무리 채워 넣어도 만족을 모르는 욕망.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망각처럼 훌륭한 도구는 없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필요한 기억과 감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우리를 보다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망각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다양한 책을 펴내면서 ‘학습 만능과 획일적 사고에서 벗어나 개성 넘치는 사고를 발휘’해야 하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담아왔다. 신작 《왜 나는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려 하는가》는 앞서 출간한 책들과의 연장선상에서 ‘망각’을 주제로 하여 한층 심화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림자처럼 몸을 숨기고 지내며, 기억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내조하던 망각을 화려한 무대 위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학습과 사고의 영역에서만 망각을 다루던 데서 나아가 인간이 본성적으로 망각하는 이유, 망각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자유롭고 발전적인 삶에 대해 총망라한다.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사는 지혜
진정 위대한 것은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앨버트 허버드는 말한다. “뛰어난 기억력은 멋지다. 하지만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소멸할 만한 가치가 있음에도, 우리는 과도한 기억력의 병에 걸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하고 저장하는 인간인가? 아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창조하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정보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기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 나날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지식에 파묻혀 있다. 이처럼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연유로 우리는 늘 기억력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정보를 저장하는데도 왜 더 똑똑해지지 않는 것일까? 왜 정작 중요한 순간 필요한 지식을 꺼내 활용하는 능력은 점점 쇠퇴하는 것일까?
그것은 정보과부하에 걸려 쓸모 있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지식의 습득이 창조적 사고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억, 망각, 지식, 사고’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숱하게 많은 정보의 창고에서 나만의 독창적 지식을 만드는 통찰적?창조적 사고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도야마 시게히코는 서슴없이 ‘망각’이라고 말한다. 과하게 먹은 음식은 체하게 마련인 것처럼 과하게 입력된 지식 역시 소화불량을 유발한다. 그래서 지식의 배설인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배우고 기억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세상,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쓸모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빠르게 구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망각은 ‘잊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나쁜 것, 부정적인 것, 상실과 소멸로 가는 것이란 폄하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불필요한 기억의 배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행복과 자유로움을 가져다주는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노수필가는 강요하거나 주입하는 대신 사색의 여정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기억과 망각에 대한 이 지적인 담론은, 행복과 성공을 설파하는 당의정 같은 책들 속에서 느리고 깊이 있게 은근하고 묵직하게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망각이란 무엇인가?
잊어버려야 할 것과 기억할 것을 구분하는 것이 망각이다
흔히 망각을 ‘100퍼센트 잊어버리는 것’이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망각은 잊어버려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때문에 망각은 기억과 대립관계에 있지 않고, 기억의 내조를 받으며 세트로 공동의 활동을 한다. 먼저 숨을 내쉬고 그 다음에 새 공기를 들이마시는 호흡처럼 필요한 것을 싹 정리한 후에 남겨진 것을 기억한다. 남이 만든 지식을 꾸역꾸역 쌓아놓고 지식이 많다고 자랑해봤자 내 것이 아니며, 아무리 지식과 정보가 머릿속에 많이 쌓여 있어도 결국 컴퓨터의 저장 능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물리적 저장능력을 자랑하는 컴퓨터와 가장 차별화된 인간의 특성은 창조적 사고이다.
도야마 시게히코에 따르면 인간은 선택적 망각이라는 것을 하는데 선택적 망각이란 유용한 것을 남기고 불필요한 것을 싹 정리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에 아무리 기억력이 완벽하다 해도 컴퓨터가 따라올 수 없는 능력이다. 인간의 기억이 개성적인 것도 망각의 이런 선택성과 관련이 있다. 같은 내용을 기억하는 데도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이해하는 이유는, 선택적 망각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력이나 지식 축적의 정도가 아닌 ‘창조력’과 ‘통찰력’으로 승부하려면 먼저 머릿속을 정리하는 일이 중요한데, 여기에서 망각이 큰 역할을 한다. 망각으로부터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비우지 않고 채우기만 하면 아래 묵힌 것은 썩는데 이는 발효가 아니라 부패다. 따라서 망각은 꾸준히 재생하고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며, 망각을 통해 인간은 보다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다.
나를 가장 나답게, 인생을 보다 자유롭게
진보, 성장, 생존을 위한 낙관은 망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머리는 잘한 것을 기억하고 못한 것을 잊어버린다. 좋은 부분만 남기고 나쁜 부분을 폐기하는 망각은 진보와 발전의 중요한 원칙이다. 만일 우리가 지난날 받은 상처, 치명적 실수, 가슴 아픈 고통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다수의 인간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극적인 생을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후퇴와 절망의 나락에서 건져 올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억이 아닌 망각이다.
《설계된 망각》의 저자 탈리 샬롯은 심리학과 신경과학의 측면에서 망각에 대해 말한다.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인간의 뇌는 무척이나 낙관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그렇게 진화되어왔으며, 그 과정에서 망각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뇌는 이런 식으로 배선되었을까? 진화 과정에서 낙관주의가 선택된 것은 긍정적 기대가 생존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낙관적 시각을 유지하고, 이를 위해 뇌가 조직적으로 기억의 망각과 왜곡을 이끌어 부정적 지각마저도 긍정적 미래 예측의 재료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망각의 중요성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니체는 “건망증이 있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했고 들뢰즈는 “기억이 욕망을 고착화시킨다.”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망각할 것을 권장했다.
이처럼 망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생존을 위한 낙관을 제시하고, 상처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을 권유하며, 과거에 발목이 잡히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발전과 진보를 선사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망각이 우리 삶에 있어 왜 그리도 중요한가?” “망각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