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저자
김태형
출판사
(주)을유문화사
출판일
2019-07-17
등록일
2019-08-29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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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극단주의자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세계적으로 극단적인 사건이 늘어나고 있다. 이별을 통보한 연인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사건,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테러 사건 등. 그런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어쩌다 그렇게 극단적이 됐을까? 이런 극단적인 성향은 바뀔 수 있긴 한 걸까?
뉴스 속 사람들이 아닌 SNS나 메신저 안 우리 주변 사람들은 어떤가. 특정 성향을 드러낸 기사나 글에 반대 성향을 가진 사람과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댓글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은 이제 흔한 광경이 되었고, 일부 장년층은 진위 여부가 확인 안 된 가짜 뉴스도 카톡으로 공유된 글이면 무조건 믿는다. 게다가 네트워크 안에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만 모여 의견을 나누면서 그 치우침을 더 굳건히 다지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배타(차단)하고 있다.
이렇게 공통 성향을 가진 집단끼리 나뉘고, 세대 간, 이성 간, 계층 간 배척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제 극단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 사회가 서로 차별하고 학대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한 언론사가 여론 조사 업체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인은 자기 계층의 이익만 좇느냐’는 5점 척도의 질문에 4.17이라는 높은 수치로 ‘그렇다’는 답변이 나왔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최근까지 각종 혐오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긴 했지만, 관련 어휘가 등장하지 않았을 뿐 가장 노골적 차별이 증가하고 있는 영역은 계층 갈등, 빈부 차별”이라며 “이른바 갑질로 표현되는 빈부 차별이 쉽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일상에는 깊게 뿌리내린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한국일보, 2019년 1월 2일자 기사).

그런데 갑자기 계층 갈등이라니, 그것과 극단주의가 무슨 상관인가 의아스러울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극단’ 하면 중용의 반대 의미인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느낌을 떠올리고, ‘극단주의자’도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극으로 치닫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내린 정의는 다르다. 심리학자인 김태형 소장은 극단주의를 심리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며 네 가지 특징을 이야기한 후 정의 내리는데, 이 특징들은 극단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바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배타성’
이성적 사고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 ‘광신’
자신이 믿는 것을 타인도 믿으라고 요구하는 ‘강요’
자신이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을 증오하는 ‘혐오’

저자는 위 네 가지 특징을 기초로 극단주의를 ‘광신에 사로잡혀 세상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자신의 믿음을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렇게 정의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왜 극단주의가 서로를 차별하고 학대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건지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설령 극단주의자가 나한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해도 그냥 거부하면 그만 아닌가?

극단주의는 무엇이 만들어 낸 괴물인가

극단주의 연구자들은 극단주의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안전에 대한 위협’을 꼽는데, 신체적?경제적 위협 같은 실재적인 위협은 물론이고 가치 체계나 세계관이 무너질 수 있는 정신적 위협도 포함한다. 안전에 대한 위협은 사회 안전망과 직결될 뿐 아니라 자존감 손상이나 삶의 의미 상실과도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문제다. 수능 중심의 우리나라 교육은 세계관이나 정체성 확립과 거리가 먼데, 세계관과 정체성 확립에 실패하면 극단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신적 위협이 극단주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권위주의(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적 성격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력감으로, 무력감이 심하면 그만큼 힘을 갈망하게 되고 이것이 심리 전반을 규정하게 되어 권위주의적 성격이 만들어진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가장 큰 특징은 흑백 논리적 사고를 하는 것으로, 이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극단주의와 얼마나 가까운지 잘 보여 준다. 어떤 사회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강자에게는 굴종하는 반면, 약자에게는 잔인한 공격을 일삼는 사회 풍조가 확산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계층 간 갈등이나 서로 차별하고 학대하는 사회를 언급한 앞부분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안전에 대한 위협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위협하는 대상에게 분노하고 혐오하게 된다. 처음에는 무시하거나 괴롭힌 그 사람만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거나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면 몇몇 사람에 대한 혐오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일반화되어 모든 인간을 혐오하게 되고, 인간을 학대하거나 공격하는 짓을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괜찮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극단주의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만약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릴수록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다면 그 집단은 극단주의를 부추기거나 최소 묵인하지 않을까? 설마 인간으로서 그러겠냐고 손사래 칠지도 모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극단주의로 민중 내 갈등을 조장해 온 집단이 있었는데, 바로 사회 지배층이다. 그들은 나뭇가지 뭉치는 부러뜨리기 힘들지만,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씩 부러뜨리기는 쉽다고 생각한다(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를 할 때 반드시 분할 통치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이 각종 사회 집단을 이간질시키는 간단한 방법은 ‘차별’이다. 차별당하면 억울하고, 억울하면 분노를 표출하게 되며, 이 분노는 주로 사회 지배층이 아닌 다른 계층들을 향하게 된다.

저자는 이렇게 다른 계층들을 향한 분노와 혐오로 만들어진 극단주의가 한국 사회에 어떻게 퍼지고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 주는데, 그중 특히 눈에 띄는 건 ‘엄마 혐오’다. 엄마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에게 잔소리하는 악역을 맡고 있다. 아이를 사회가 만든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과 (본인 기준이지만) 애 잘되라고 잔소리하는 건데, 이 잔소리 때문에 아이들의 혐오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엄마들이 학교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취급받고 있는지 알면 정말 놀랄 걸요”라는 한 중학교 교사의 말도 심각하게 느껴지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엄마는 한 아이에게 최초의 인간관계 대상이자 기본적인 인간관계 대상이기에 엄마와의 인간관계가 아이의 인간관과 인간관계를 좌우한다는 거다. 만약 아이가 엄마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 아이가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해진다. 즉 엄마 혐오가 인간 혐오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극단주의가 우리를 집어삼키기 전에 없애야 할 극단주의의 씨앗들

저자는 서구 심리학(특히 미국 심리학의 집단 극단화 이론)이 어떻게 지배층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야욕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고 옹호해 왔는지 - 안타깝게도 한국 심리학계는 이런 미국 심리학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무관한 일로 치부할 수 없다 - 와 민중 항쟁까지도 극단주의로 몰아세우며 엉뚱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행태를 비판하는데, 그 과정에서 기득권의 이면과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리고 분석과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학대 위계 사회가 되어 버린 한국 사회 내 약자 혐오와 극단주의 확산의 여러 사례를 들면서 우리 사회에 맞는 극단주의 예방법과 근절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극단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용된 단어다. 특정 이념을 광신하는 이들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를 ‘과격분자’라는 나쁜 이미지로 포장하면서 ‘극단적’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그래서 불평등에 항의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오히려 한쪽으로 치우친 집단으로 매도되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심리학자 김태형의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누가 진짜 극단주의자인지를 짚으면서, 이들이 왜 자신의 욕망을 약자를 비난하는 동력으로 사용하는지 정교히 관찰한다. 특히, 인간과 사회 사이의 무수한 실타래를 외면한 미국 주류 심리학을 비판하며 기득권의 민낯을 까발리는 대목이 통쾌하다. 기존 심리학의 그릇된 관성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혐오를 하거나 받는 한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오찬호(『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


책 속으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와 일본 경찰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일본 경찰 네가 바라는 것이 뭐냐?
독립운동가 몰라서 묻느냐? 당연히 대한 독립이다.
일본 경찰 그것은 우리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요구다.
독립운동가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일본 경찰 독립에 대한 요구를 조금 누그러뜨릴 의향은 없는가?
완전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약간 자치권을 얻는 것으로 타협해 보지 않겠는가?
독립운동가 개수작 말고 꺼져라!

이 가상의 대화에서 독립운동가는 대단히 비타협적이다. 즉 일본과 타협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런 그의 태도를 배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아가 그는 극단주의자인가? 당연히 아니다. 독립운동가는 배타성이 아닌 비타협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극단주의자가 아니다. 흔히 비타협성은 억압당하는 계급 혹은 민족의 편에 확고히 서는 당파성에서 비롯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고 대한 독립이라는 목적을 긍정하며 억압받는 민족과 정의의 편에 굳건히 서 있는 당파성과 그것에서 비롯된 일본 제국주의와 불의에 대한 비타협성은 극단주의가 아니라 인류 역사를 진보시켜 온 원동력이다. - 31~32쪽


짐바르도의 실험은 대중에게 인간은 상황적 압력이 있으면 누구나 다 악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다 잠재적 악마니까 나쁜 짓을한 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속삭인다. 이런 악마적인 속삭임은 이 짐바르도의 실험이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잔학 행위를 저지른 미군 병사들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는 데에 요긴하게 쓰이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스타인은 이런 일반적인 주장들, 특히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 병사들이 저지른 끔찍한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서 “이 사건에서 군인들은 죄수들을 개 목줄로 묶어서 끌고 다니고, 죄수들에게 구강성교 장면을 연출하게 하고, 담배를 피우는 여군 병사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도록 시켰다. (여군 병사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좋다고 동의했다.) 미군 병사 한 명은 남자 포로들을 성폭행하겠다고 협박하고, 빗자루 대와 의자로 폭행하고,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차고, 강제로 여자 속옷을 입혔다. 이러한 학대 행위는 군 지휘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행실 나쁜 일부 병사들이 저지른 일탈 행위가 아니라, ‘상황의 압력(situational forces)’이 초래한 예상 가능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 190쪽
(…)
아부그라이브 사건은 부정의한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의 정신이 얼마나 황폐해지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 일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더라도 정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정신이 거의 병들지 않지만 부정의한 일을 하는 사람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병든다. 과거에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침략했을 때, 한국인들은 독립군 등을 조직해서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독립군은 일본의 민간인은 물론이고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잔학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군은 불타는 집에 살아 있는 아기를 던져 넣는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끔찍한 잔학 행위들을 저질렀고, 731부대를 운영하면서 인간을 대상으로 독가스 실험을 하는 등의 상상하기조차 힘든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 왜 똑같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음에도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이런 차이가 발생했던 것일까? 단순하게 답하자면 독립군들은 정의로운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부정의한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191~192쪽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을 혐오하기 마련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것이 실재적인 위협이든, 정신적인 위협이든 간에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을 혐오하거나 증오하게 되고, 그 대상을 향해 강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나아가 만일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 무차별적 타인들 - 가 자신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믿게 되면, 인간 자체를 혐오하는 인간 혐오 심리에 물들게 된다. 앞에서 교정 테러리즘으로 명명되었던 미국의 총기 난사범들은 왜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에게 직접 피해를 끼치지 않은 무차별적인 군중을 향해 총을 난사했을까? 이들의 행동은 인간 혐오 심리를 배제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228~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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