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환
방문을 열었을 때 온통 새하얀 눈의 세계가 보이면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무언가 형용키 어려운 반가움이 마음속에서 불러일으켜집니다. 그 정경은 이 세상에 있는 기쁨이나 행복감을 미리 예견해주는 것 같습니다. 달도 별도 없는 밤이어도 눈의 빛은 제 스스로 인광과도 같은 빛을 발해 세상을 하얀 고요로 쌉니다. 어디선가 어깨 위로 머리 위로 앉은 눈을 털어 내는 소리가 들리고, 신발에 묻은 눈을 발을 굴러 털어 내는 소리도 들립니다. 밤이 깊도록 눈의 고요가 적막 위에 쌓입니다. 그 적막을 더욱 적막 속으로 떨어뜨리는 먼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밤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이 깊어집니다.
당신과 처음 만난 삼 일 후 다시 그 장소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전자파와도 같은 수치의 공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저는 매일 저녁녘 어스름이 내릴 무렵 손지갑을 챙겨 들고 동네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저녁 찬거리를 사오는 길에 왠지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해지곤 했습니다. 골목 앞에서 골목 저쪽 당신의 옛집이 있는 부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은 늘 어둠이 몰려 있었고, 그러면 저는 당신은 제 상상의 산물인가 다시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외로운 나머지 제가 어떤 일을 스스로 꾸며낸 것이라고요. 밤에 꾸는 꿈처럼 낮에 눈을 뜨고 꾼 꿈일 뿐이라고요.
제가 오늘 여기에서 숨쉬고 있는 것은 할머니와 그보다 더 위에 선조들로부터 무동을 타듯 이어 내려온, 오로지 그 덕분이지요. 그것이 확실합니다. 당신과 플라타너스 밑을, 밑으로 처진 나뭇가지 때문에 간혹 허리를 굽혀 걷던 때 저는 문득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선조들의 피,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 까마득한 그 너머 어머니들의 숨결을 느꼈지요. 그녀들이 무동을 태워 저를 여기 이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거리에 결국은 세워 놓은 것이라고요.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맛보라고 말이지요. 훗날 어느 때엔가는 그들의 마음속에 품었던 한을 꽃피우라고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