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여자
헤어지고 난 후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어느 누구보다도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작가 최민석,
그가 말하는 ‘쿨한 연애’ 소설
2012년 장편소설『능력자』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민석이 신작 소설『쿨한 여자』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실렸던 단편소설 「쿨한 여자」를 모태로 하여 탄생한 경장편소설로, 작가는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2010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은 최민석은「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통해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끝까지 읽게 만드는 필력이 예사롭지 않”으며, “화자의 시선이나 화법 등에서 이미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추고 있다”는 평을 받았고, 이후 다수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아왔다.『능력자』에서 보여주었던 무명작가 ‘남루한’의 유머러스한 캐릭터는『쿨한 여자』의 주인공인 소설가 ‘경도진’으로 오버랩되며, 이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문학적 방향과 삶에 대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건 그냥 만나는 거지,
반드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냐”
‘쿨하다’는 건 뭘까? 영어사전에는 ‘조용한’ ‘차분한’ ‘냉정한’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맥락을 종합해볼 때 ‘쿨함’이란 어떠한 환경적, 감정적 변화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평정심을 냉정하게 유지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사랑하는 애인이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자고 해도 전혀 감정적 변화 없이 (심지어 웃으면서) 승낙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 시대의 ‘쿨한’ 인간인 것이다. 최민석의 연애소설 ?쿨한 여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헤어진 여자 친구와 다시 만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회사를 그만 둔 나는 별 일 없이 소설만 쓰고 지내다, TV 화면 한 쪽에 걸린 ‘남아공 월드컵 D-15일’이란 자막을 보게 된다. 그러다 ‘헤어지더라도 남아공 월드컵에는 함께 가자’는 약속 때문에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전화를 받고, 둘은 3년 만에 재회를 한다.
그리고 둘은 마치 컨베이어벨트에 오른 부품처럼 예정이나 되었다는 듯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나’ 역시 알 수 없는 자기감정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선 시간의 열쇠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둘은 이렇게 다시 각자 삶의 껍질 속에 들어가 버린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날 밤 일을 글로 쓰지 않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나는 소설가가 된다.
소설가가 된 나는 작가들과 함께 제주 강정마을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한 시인을 만나게 된다. 술기운에 연인 비슷한 관계가 된 시인과 나는 엉겁결에 나가사키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일이 펼쳐지게 되는데……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잠재적 이별의 대상이다”
쿨함을 넘어서는 서정, 소설을 통해 삶과 사랑을 바라보다
“연애소설에 관한 한, 명백히 두 부류가 존재한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연애사를 통해 독자의 판타지를 만족시켜주는 부류.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나의 연애사를 되돌아보게 되는 부류. 최민석의 연애소설은 이 두 지점의 경계를 교묘하게 지나간다. 이것은 1차적으로 소설의 형식에서 기인한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쿨한 여자?는 단편소설에 새로운 장(章)들을 보태어 경장편소설로 엮은 것이다. 그래서 2부가 시작되면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그녀와의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썼다. 방금 당신이 읽은 이야기, 즉 ‘1부. 쿨한 여자’가 바로 그 소설이다. 그리고 나는 소설가가 됐다.”(65쪽)
작가는 기존의 소설 안에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대신, 지난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보존해두고 주인공을 소설가로 만드는 방법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단편소설 ?쿨한 여자?는 원래 현실에 존재하던 소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또 하나의 소설에 소품으로 삽입되면서 작품 전체는 묘한 판타지적 성격을 띠게 된다. 또한 이 소설은 ‘쿨함’을 욕망하는 우리의 판타지를 다루는 동시에 본질적으로 ‘쿨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날렵하고 예리하게 파고든다.
“물결은 바람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발생적인 결과다. 빛은 그 물결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흔들린다. 우리의 재회는 자연발생적인 결과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연발생적인 결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132쪽)
“어쩌면 그때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은 그녀와의 재회가 아니라, 그래서 그녀와의 또 다시 펼쳐질 미래가 아니라, 그리움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그리움의 감정 자체를 불러일으켜 세워 내가 가장 나다웠던 시절과 재회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는 나 자신이었던 걸까.”(179쪽)
소설은 헤어진 연인의 애틋함(혹은 찌질함)과 언어적 유쾌함(혹은 쿨함) 사이를 유영하며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바로 ‘자아의 발견’이다. 헤어졌지만 헤어지지 못하는 남녀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영원한 환상을 그린 이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소설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삶과 사랑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