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못난 개항
쇄신과 망국의 기로에 선
개항기 조선의 맨얼굴을 보다!
격동의 시기, 조선과 일본의 개항 풍경을 비교하다
1876년 개항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34년간의 조선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게 움직이며 좌충우돌했다. 망국을 향해 폭주하는 조선이란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들은 마차를 끌던 마부라 기차를 어떻게 움직여가야 할지 몰랐다. 마부 수준의 기관사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을 압박하는 중국·일본·러시아를 ‘활용’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또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혈안이었다. 그러다보니 기차는 더욱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과 일본의 역사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해 강제 개항을 시작했지만, 하급무사와 지식인이 결합해 구체제를 해체하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조선은 개항 이후 34년간 허송세월을 했으며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저자는 조선이 개항기에 허송세월을 한 이유와 원인을 낱낱이 규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조선의 개항과 일본 개항의 차이를 밝히고, 나아가 조선은 국가개조에 왜 실패했고 일본은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비교 분석한다.
지도력의 차이가 개항기 조선과 일본의 명암을 가르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대내외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 좌충우돌했다. 조선이란 기차를 자국에 유리하게 몰고 가기 위해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으로 충돌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군대를 상주시키고 간섭의 수위를 높여가던 종주국 청나라를 몰아냈는데도 러시아?프랑스ㆍ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자 1895년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53년 개항한 일본은 1867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대정봉환을 시작으로 판적봉환, 폐번치현, 폐도령과 질록처분 등의 봉건질서 해체 과정을 거쳐 기득권층인 무사들의 몰락, 1885년 내각제로 전환, 1889년 메이지 헌법 공포와 시행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개항 37년 만에 국체를 완전히 바꾸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득권을 빼앗아오는 일은 쉽지 않아, 일본도 개항 이후 40년은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었다. 막부파와 존왕양이파의 갈등이 심해 암살이 빈번했고, 메이지 천황의 왕정복고가 선언된 직후 메이지 정권과 막부 사이의 보신전쟁, 무사들의 칼 착용을 금지하는 폐도령에 반발한 게이신토의 난, 개화론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세이난 전쟁 등의 내란 발생으로 인해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는다.
개항기에 극심한 내부적 혼란과 사회적 동요를 겪은 것은 같지만 개항의 결과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동북아의 강국 부상한 일본으로 명암이 극명하게 갈렸다. 일본은 어떻게 내부의 갈등과 혼란을 뚫고 개혁성과를 내게 된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어떻게 국민의 역량을 통합해서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 즉 지도력의 차이에서 찾는다. 일본은 대체 어떤 지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또 지도력을 가진 인재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런 인재들은 조선의 인재와 어떤 차별성이 있었을까? 그리고 수백 년 동안 누적된 사회·경제·문화적인 기반과 환경은 어떻게 인재를 성장시키고 지도력의 차이를 가져왔을까?
개화기 조선에는 일본 하급무사처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개화파가 없었다
일본의 개화에는 하급무사 출신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구체제 해체의 주체로 지식인과 결합하여 무혈혁명으로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여 메이지 신정부를 40여 년간 운영한 하급무사들은 정치참여를 금지한 막부의 오랜 관행을 깨고 나왔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양이론의 세계관도 깨고 나왔다. 그리고 역시 하급무사 출신인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지식인들이 내놓은 개화사상과 만나 중세적 질서의 일본을 근대적 국가로 변화시켰다. 끊임없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자신의 한계를 깨고 나온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설계자라 불리는 사카모토 료마도, 안중근의 손에 죽은 이토 히로부미도 하급무사 출신이다.
고종은 1863년에 즉위해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이 빌미가 돼 퇴위하기 전까지 43년이나 조선을 통치했다. 똑똑한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회수한 스물한 살의 고종이 과연 국정을 잘 운영했는가? 친정체제로 돌아선 고종이 한 일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펼친 국내 개혁정책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개혁의 전면 부인이었다. 고종은 시기에 따라 친일파, 때론 친청파, 때론 친미파, 때론 친러파 대신들과 함께 행보했다. 개화적인 군주였다가 보수적 군주였고, 다시 개화적으로 변신했다가 또 다시 보수화됐다. 정책적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전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인재들의 씨를 말리곤 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와 홍영식은 바로 살해됐고, 고종은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에게는 대역부도죄인으로 능지처사를 선고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당시 한성에서 개화에 관심이 있었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위 직후부터 1873년까지 대원군 집권 시절을 빼도 33년의 길고 긴 세월 동안 집권한 고종이 그 시기를 현명하게 통치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온 힘을 쏟았더라면 상황은 다소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일제 식민지 기간이 짧아질 가능성도 있었다. 식민지 시절이 짧았더라면 조선의 지식인들이 훼절하고 부역하는 일도 적었을지 모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세월 동안 대체 고종은 무엇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 그리고 그를 둘러싼 조선의 인재들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하는 안타까움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