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셔츠
세계적 베스트셀러『파이 이야기』에 이어
전 세계가 주목한 얀 마텔 작가의 걸작 우화!
“셔츠가 어디에나 있듯이, 홀로코스트는 어디에나 있다!”
희곡「20세기의 셔츠」에 숨겨진 미스터리한 진실
증오와 광기를 신선하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담은 우화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이 인도하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
그 끝은 어디에 가닿을까?
『20세기의 셔츠(원제: Beatrice and Virgil)』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의 또 다른 장편소설이다. 제34회 부커상 수상작이자 41개국에서 번역 출간되며 작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파이 이야기』이어 전 세계가 주목한『20세기의 셔츠』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해온 작가의 집념이 독창적인 상징으로 빛나는 우화 형식에 결합된 작품이다.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상징적으로 조망한다.
얀 마텔은 “셔츠가 어디에나 있듯이, 홀로코스트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20세기 중엽에 일어난 인류의 대학살이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 학대라는 이름으로, 성 차별과 인종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 모든 불합리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의 고유명사가 바로 오늘날의 홀로코스트이다.
『20세기의 셔츠』에서 작가 헨리는 ‘왜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방식은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왜 상상력이나 비유를 개입시킬 수 없는가’ 하는 데 의문을 갖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소설을 완성한다. 하지만 출간하기도 전에 관계자들에게 혹평을 받고 글쓰기를 중단한 채 익명의 삶을 살아간다. 어느 날 독자가 보낸 의문의 소포, 뭔가를 감춘 듯한 토막 난 희곡 <20세기의 셔츠>를 받으면서 그의 안온하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헨리는 이 희곡을 쓴 사람을 만나 그가 희곡을 완성하는 것을 돕게 되고, 어둡고 거칠고 두려운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끌려들어간다.
희곡 속 주인공인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잔뜩 굶주리고 지치고 겁에 질린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마냥 길을 걷고 있다. 이 이름은 단테의『신곡』에서 길을 잃은 단테를 연옥과 지옥으로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버질)와 천국의 안내자인 베아트리체(베아트리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작가는 죄에 빠진 단테가 올바른 길로 돌아가기 위해서 안내자가 필요했듯이,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안내자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기를 거부해온 역사적 사건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순전히 상상적인 방식, 그러나 그 사건의 정서만은 그대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써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는 폭력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하는 동시에, 삶의 진실과 인간의 신념을 밝혀줄 새로운 안내자를 만나게 한다.
『20세기의 셔츠』라는 제목은 알레고리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 모든 문명에서 셔츠는 닳아 해졌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다. 셔츠가 어디에나 있듯이 홀로코스트도 어디에나 있다. 한 집단의 인격과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집단학살 뒤에 감추어진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팽배하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홀로코스트를 20세기의 셔츠라고 생각했다. 그 셔츠는 20세기 중엽 유럽 유대인들이 입은 셔츠였지만 이 땅의 어디에서나 입을 수 있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처절한 비극,
‘홀로코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한 걸그룹 멤버는 라디오 방송에서 ‘민주화’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개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민주화시키지 않는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 ‘민주화’는 ‘왕따 한다’, ‘억압한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은어다. 일베는 극우 보수 성향을 가진 유머 사이트로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여성과 소수자, 약자를 비하한다. 걸그룹 멤버의 ‘일베충(일베 사용자들이 스스로 비하하거나, 비하당할 때 쓰는 말) 인증’이 충격적인 이유는 일베 현상이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 성향을 띤 특정 집단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한발 앞서 일본판 일베충 ‘넷우익’이 등장했다. 이들은 2007년 ‘재일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들의 모임(재특회)’을 만들었다. 재특회 회원들은 재일 조선인이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고, 고용 불안, 경제 불황, 복지 후퇴 등 사회 부조리의 원인을 모두 재일 조선인의 탓으로 돌린다. 또한, 재일 조선인을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재일 조선인은 목 매달아 죽이자”는 극단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일반인조차 그들의 주장을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재특회적인 생각과 행동이 언제든 일본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베와 재특회 회원들의 공통점은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지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사회 양극화와 뿌리 깊은 불평등 구조 때문에 루저가 된 청년들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고, 자본과 권력을 우상화하며 사회적 박탈감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이는 곧 폭력성과 전체주의, 우상화 및 약자 혐오라는 특성을 지닌 파시즘의 성격을 띤다. 파시즘은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 집단을 표적 삼아 폭력을 휘두른다. 이러한 파시즘에서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 즉 홀로코스트와 같은 인류 최대의 비극이 벌어졌다. 일베와 재특회 현상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전체주의와 폭력성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이해와 타협, 다양성과 존중은 설 자리가 없다. ‘죽지 않으려면 죽이자’라는 필살의 구호만 남았다. 그러나 내가 살 수도 있지만 언제든 나도 죽을 수 있다는 함정이 도사린다. 이것이 바로 21세기판 파시즘의 모습이다.
『파이 이야기』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얀 마텔의『20세기의 셔츠(원제: Beatrice & Virgil)』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이다. 『20세기의 셔츠』에서는 홀로코스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셔츠가 어디에나 있듯이 홀로코스트도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폭력성과 전체주의, 우상화와 약자 혐오는 어디까지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루저 집단의 광기와 증오에 불과할까? 우리 주변에 있는, 어쩌면 내 안에 각인되어 있는 광기와 증오도 이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얀 마텔은 홀로코스트가 단순히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화석화된 역사의 상흔으로만 남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지 않으면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영 잊히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다시금 홀로코스트에 사로잡혀야만 하는 이중적 과제 앞에 놓여 있다. 그 과정은 지난하지만 감출 수 없는 경악과 공포, 찬란한 감동과 슬픔이 펼쳐져 있다.
이 작품에서 얀 마텔은 삶의 주변부로 물러나야 했던, 말 못하고 힘없는 이 땅의 수많은 희생자들을 다시 소환한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실어증을 앓던 것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지리멸렬한 언어이자, 지배의 언어, 폭력의 언어에 마지막 힘을 다해 저항하는 보석같이 아름다운 언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일상 가까이에 있는 폭력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동시에, 삶의 진실과 인간의 신념을 밝혀줄 새로운 안내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파이 이야기』의 작가 얀 마텔이 쓴
잊히지 않을 홀로코스트에 대한 우화
그런데 많고 많은 홀로코스트 소설들 중에서도 얀 마텔의 작품은 좀 독특하다.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소설이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내용과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는 데 반해, 얀 마텔은 이러한 기존의 문법을 깨고 소설 속의 희곡이라는 이중구조를 도입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드니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단테의 『신곡』, 이 세 작품의 모티프가 녹아 있는 이 희곡은 셔츠라는 나라의 허리쯤에서 벌어지는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교훈을 주기 위한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거대한 비극 앞에서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이야기는 너무나 천진하며 천진한 만큼 슬프고 아릿하다. 단테의 『신곡』에서 주인공이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했듯이, 소설 속의 주인공과 우리는 버질과 베아트리스의 안내를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적 진실에 닿게 된다. ‘우화’라는 형식이 접목된 이 희곡은 소설의 핵으로서 우리 심장 속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다른 차원의 기념비가 된다.
영문학자 알라이다 아스만은 그의 저서 『기억의 공간』에서 “기억의 진실은 다름 아닌 사실의 변형에 그 본질이 있을 수 있다. 기억이란 설령 명백히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어떤 차원에서는 진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진실을 포착하려면 정신분석가나 예술가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언어로 재현된 기억의 재구성에 의존한 기존 홀로코스트 소설과 얀 마텔의 소설이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얀 마텔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우화를 통해 우리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알레고리를 창조했다. 얀 마텔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존의 건조한 정의에서 ‘예술의 자유로움’을 놓친 것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홀로코스트는 언제나 홀로코스트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홀로코스트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존재”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홀로코스트를 생각하고 묘사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 홀로코스트는 언젠가 역사의 먼지 속에 사라질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존재하려면, 언제까지나 색 바랜 낡은 사진으로만 우리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안내를 받아볼 만한 이유를 얻게 된다.
소설가의 소설보다 박제사의 희곡이 낫다면?
헨리, 헨리를 만나다!
『20세기의 셔츠』 속 주인공인 소설가 헨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픽션과 논픽션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기 위해 출판사 관계자들과 접촉하지만, 돌아온 것은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떠나고 싶을 정도의 절망감뿐이었다. 그런 그가 아내와 함께 옮겨 간 낯선 도시에서 팬이 보낸 이상한 우편물 하나를 받는다. 봉투 안에는 플로베르의 단편 소설 「호스피테이터 성 쥘리앵의 전설」과 누군가가 쓴 「20세기의 셔츠」라는 희곡의 일부분, 그리고 봉투에 쓰인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짧은 메시지.
헨리는 마침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그에게 직접 답장을 전해 주려고 봉투에 적힌 주소를 따라 간다. 그곳은 그와 동명인 박제사 헨리의 ‘박제상회’였다. 그곳에서 박제사를 만나게 된 헨리는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박제상회에 들러 박제사가 쓴 우화식 희곡 「20세기의 셔츠」의 부분들을 조금씩 읽어 나가면서 박제사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헨리는 플로베르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 쥘리앵이 이유 없이 동물사냥에 취해 동물들을 학살한 내용을 희곡 「20세기 셔츠」와 연결 지으면서, 박제사가 동물들이 이처럼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그렇게 확신하는 바로 그때, 헨리는 자신의 확신으로부터 배신당한다. 희곡에서 당나귀와 원숭이, 즉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해치는 잔인한 소년이 실제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깨닫는 순간, 자신이 희곡 속에 등장하는 학살의 희생양이 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실패한 소설과 흥미로운 희곡, 소설가 헨리와 박제사 헨리, 홀로코스트와 동물 학살, 박제된 야생동물들과 살아있는 애완동물들, 그리고 플로베르의 단편소설. 절묘한 상징, 치밀한 구성, 대비되는 구도, 서술적 소설과 우화적 희곡의 묘한 어우러짐을 통해 우리는 어느새 소설 속에 몰입하게 된다. 얀 마텔은 느슨해 보이는 듯한 전체 이야기 구조 속에서 방심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조금씩 진실의 단편들을 벗겨내 보여 준다. 마침내 진실의 단편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순간, 독자들은 경악과 감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