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
왜 시대의 우울은 여전한가?
비참을 견디다 못해 검은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
한국 문학의 이단아 백민석이 새롭게 펼치는 불경과 비도덕의 디스토피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한 단편들의 작품집 『수림』은 정권 교체 이전의 사회를 은유한다. 삶이 요구하는 자리매김의 위치까지 분연히 달려온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과 이웃과 형제와 친구들이 벌이는 불경스러운 행태와 신경쇠약의 징후들이 한여름 장맛비처럼 어둡게 흘러내리며 뒤섞인다. 소통 불능과 무력감이 극단에 치달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될까? 『수림』은 백민석이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접근한 디스토피아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시대의 우울은 여전한가? 비참을 견디다 못해 검은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
한국 문학의 이단아 백민석이 새롭게 펼치는 불경과 비도덕의 디스토피아!
90년대 신세대문학의 대표, 뉴웨이브의 아이콘, 문단의 앙팡 테리블…. 이십 년 넘게 소설가 백민석을 칭하는 레토릭은 늘 특별하고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것이었다. 활황하던 자본주의의 최전선, 그 음지에서 뻗어나가는 불길한 욕망과 분노를 기괴한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그의 소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절망과 불안을 자극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문학은 하나의 ‘전조’였고, 에너지였다. 그렇게 세기말이 지나고 2003년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잠적했던 그가 십 년 만에 문단에 돌아왔지만, 백민석이 전하는 ‘삶의 비참을 견디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고 유효했다. 시대정신은 퇴보했고,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오히려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연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와의 끝없는 사투이자 대결이며 물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문단으로의 복귀 후, 펴내는 두 번째 소설집 『수림』은 그 사투 속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자들의 처절한 내면을 보여준다. 멀쩡한 척 정상적인 척, 삶이 요구하는 자리매김의 위치까지 분연히 달려온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과 이웃과 형제와 친구들이 벌이는 불경스러운 행태와 신경쇠약의 징후들이 한여름 장맛비처럼 어둡게 흘러내리며 뒤섞인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흥분과 도발의 에너지는 우울한 장맛비 속에 잠식되었고, 물러날 수 없기에 그저 내면으로 침잠해갈 수밖에 없는 우울과 절망의 그림자가 도시를 뒤덮고 있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연작의 형태를 지닌 이 소설은 정확히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한 단편들로서 정권교체 이전의 사회 분위기를 은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통 불능과 무력감이 극단에 치달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될까? 『수림』은 백민석이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접근한 디스토피아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귀퉁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검은 빗줄기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세상은 날 증오하는 거지?”
무력감과 낭패감, 삶의 불안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위악과 비도덕의 아우성
‘수림(愁霖)’은 어두침침하고 우울하게 내리는 긴 장맛비이자, 시름겨운 장마, 슬픈 장마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총 아홉 편의 이야기가 이어달리기처럼, 앞선 단편의 주인공이 이어지는 단편의 인물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겨주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연작소설은 늘 어둡고 긴 장마가 내린다. 실제 여름에 내리는 장맛비이기도 하고, 주인공의 내면에 계속해서 내리는 우울과 슬픔의 빗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듯 삶을 일구고 있으나, 그 이면으로는 상식과 도덕을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행태들을 보이며 끝을 모르는 무력감과 불안감으로 자신의 삶을 파괴해나간다.
첫 번째 작품인 「수림」의 주인공 남자는 강남의 그럴듯한 대기업 과장이며 주말에는 봉사활동을 다니고 있지만, 성 도착증세로 인해 아내에게 이혼 당했다. 또 그와 봉사활동을 함께하는 여자는 자살 중독에 시달린다. 그녀의 이야기는 두 번째 작품 「비와 사무라이」로 이어지며 안정적인 남편의 보호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계속 주변에 어른거리는 노숙자들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검은 눈」의 남자 주인공은 소설가이자 화려한 여성편력을 갖고 있지만, 자살한 형의 환영에 시달리며 매번 섹스에 실패한다. 소설가의 애인이자 확신 없는 사랑에 불안해하는 시인은 나이 어린 제자와의 아슬아슬한 밀회를 통해 공허함을 달래며, 어린 제자는 성적 탐닉을 향해 사냥개처럼 질주한다. 얽히고설킨 인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타락하고 소멸해 가는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마침내 첫 번째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수림』에는 우울한 장맛비처럼 성도착자들과 자신의 성을 파는 소녀들과 강간당한 여성들과 섹스에 실패하는 남성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여성혐오의 시대, 여전히 권위적이며 우월한 성적 효능감을 찾고 있는 한국 남성들에 대한 위악적 제스처임을 백민석 작가는 밝힌 바 있다. 우울한 비를 피하기 위해 죽음의 처마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회란 무엇일까? 『수림』은 개인의 불안과 공포가 소리 없이 들불처럼 전염되는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킨다. 그 어떤 지옥보다 무서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