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한국문학의 가장 낯선 존재,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 배수아 신작 소설
아홉번째 소설집 『뱀과 물』에서 배수아는 어린 시절(소녀 시절)로 독자를 이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어린 시절이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어린 시절-성장-성년"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내가 자라서 지금의 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사이에 순차적 단계는 없다. 꿈같은, 무한한, 자유로운, 그러므로 그 어떤 서사보다 매혹적인 "낯섦"을 선사하는 작가 배수아. 독자들은 이번에도, 저마다 다른 풍경을 발견할 것이다. 백 명의 독자에겐 백 명의 배수아, 천 명의 독자에겐 천 명의 배수아가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배수아라는 장르이다.
배수아의 소설은 가난과 광기의 세계로 추락해 그 파멸의 힘으로
영원한 꿈이 된다. 잃어버린, 사랑했던 것들이 그 꿈 속에서 다시 떠오른다.
_강지희(문학평론가)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한국문학의 가장 낯선 존재,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 배수아 신작 소설
한국문학에서 ‘배수아’라는 이름은 이국(異國)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이전 세대나 동시대 한국문학의 영향 혹은 수혜를 받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 그의 작품들, 서사보다는 이미지, 분위기, 그리고 목소리에 가까운 편편은 종종 ‘이것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도 하였다. 그러나 이 낯선 존재가 펼쳐 보이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는, 지난 24년, 열세 권의 장편과 여덟 권의 소설집을 통해 꾸준히 마니아층을 형성해왔다. 그 세계에 번역가라는 새로운 푯말 하나를 더 꽂으며 배수아는 자신의 이름만큼 이국적인 새 이름들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로베르트 발저, W. G. 제발트, 막스 피카르트, 사데크 헤디야트, 토마스 베른하르트… “소설가보다는 번역가 아이덴티티로서 『악스트』에 참여하게 된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격월간지 『악스트』의 편집위원으로서 해외문학을 담당하게 된 경위 역시 비슷한 맥락임을 알 수 있다.
번역가 배수아를 통해 해외문학의 지평이 넓어진 것이 반가운 만큼 작가 배수아의 소설을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2010년 『올빼미의 없음』(창비) 이후 7년 만의 소설집 『뱀과 물』을 펴낸다. 2016년 경기문화재단 지원사업의 결과로 출간된 소설집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테오리아)이 있으나, 단 두 편의 단편만으로는 긴 기다림이 해소되기엔 아쉬움이 컸다.
“기나긴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나를 상상하는 놀이였다.”
―어린 시절이라는 악몽에 대하여
아홉번째 소설집에서 배수아는 어린 시절(소녀 시절)로 독자를 이끈다. 작품 속 어린 시절은 ‘비밀스러운 결속’(38쪽)과 환상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여리고 순수한 것과는 동떨어진 일들. 부모의 부재, 그들을 찾아 떠나는 길, 무거운 가방, 눈이 내리거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들. 일곱 살이 되면 더는 남자아이 행세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소중한 존재를 지킬 힘이 여전히 나에게는 없다. 그리고 죽음에 눈을 뜬다. 그러므로 무구한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된 뒤 혼탁해지는 것이 삶이 아니라는 것. 아련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는 것은 망상에 다름없다는 것. 그 망상 속 어린아이는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일 뿐이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_94쪽, 「1979」에서
그러므로 작가가 말하는 어린 시절이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어린 시절-성장-성년’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내가 자라서 지금의 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사이에 순차적 단계는 없다. 작품집 첫머리에 자리한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니는 어떤 꿈을 꾸었나」(이하 「눈 속에서」)의 ‘나’가 머물던 유원지. 그 한가운데 자리한 것은 거대한 대관람차이다. “지구 자체, 혹은 그 이상으로 커다란 어떤 것”이자 “올라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는 그 대관람차”가 “사실은 대관람차가 아니라, 시간의 실체를 실어나르는 바늘 없는 시계”라는 것은 그러므로 중요한 지표이다. 배수아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으며, 독자는 1분 1초라는 질서의 세계가 아닌 ‘시간의 실체’를 비틀어 펼친 몽상적 세계의 완전히 새로운 문법으로 작품에 미끄러져 들어갈 수밖에 없다.
현재의 나는 정말 존재하는 실체인가? 어린 시절 나의 상상 속 인물은 아닌가? 미래가 이미 도래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가? 삶에서 겪은 모든 일들이 정말 일어났던 일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188쪽)는 믿음은 어떤가.
우리는 배고픔도, 갈증도, 더위도 잊었다. 바다는 모든 것의 경계 너머에 있는 먼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파도의 흰 거품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처형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어느덧 늙고, 네이팜탄에 불타고, 유방암을 앓고, 초록 개구리에게 먹혔으며, 이 모두를 원한이나 공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누구도 행복하거나 불행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던 태양이 어느덧 살짝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_168쪽, 「도둑 자매」에서
또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편편에 ‘쌍’으로 등장하는 소녀들이다. 연작처럼 읽히는 「눈 속에서」와 「노인 울라에서」의 ‘나’와 ‘눈먼 소녀’. 「눈 속에서」는 유원지에서 아버지가 사라졌음을 발견한 ‘내’가 스키타이족의 무덤으로 떠나기까지의 이야기이고, 「노인 울라에서」는 ‘내’가 거인 아버지를 찾아 가장 북쪽에 있는 역인 노인 울라에 도착하면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다. 「눈 속에서」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읽어준 책은 빨치산 소녀 ‘눈(snow) 아이’가 등장하는 『눈 아이』이며, ‘나’는 이름을 묻는 경찰관에게 자신의 이름이 ‘눈 아이’라 대답한다. 미아 센터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눈 아이’, 뒷모습이 얼핏 아버지와 닮은 남자가 리본을 맨 ‘눈먼 소녀’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목격한다. 리본을 맨 눈먼 소녀는 「노인 울라에서」에 또다시 등장하며 이 소녀의 이름이 ‘눈 아이’이다. 눈먼 소녀는 『눈 아이』 속 빨치산 소녀처럼 목이 꺾인 채 교수형을 당하고, 소녀의 리본을 내가 매달며 나와 눈먼 소녀는 비밀스러운 결속을 이어간다.
「얼이에 대해서」의 ‘나’와 ‘얼이’도 한 쌍이다. 나의 여동생이 태어난 때 얼이는 유괴당해 죽는다. 나는 하나의 탄생에는 하나의 죽음이 필요함을 깨닫고, 자신이 원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여동생이 태어나 얼이는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어른이 된 나는 어린 시절 모습에서 확대된 얼이를 한 번 만난다. 나는 얼이를 알아보지만 얼이는 나를 나로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미친년이 간다!”라고 매번 놀림당한 얼이 어머니와 똑 닮은 나를, 마을의 미친 여자인 나를 오래오래 바라볼 뿐이다.
「1979」의 키 큰 소녀와 작은 리우진도 있다. 반에서 가장 성숙한 ‘키 큰 소녀’에게 미묘한 성적 끌림을 느끼며 집착하는 남자 교사가 우연히 목격한 장면은, 이 소설집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아찔하고 몽환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아이들은 낡은 담벼락 앞에서 멈추어 서더니 각자의 손가락을 담벼락의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교사는 거칠고 딱딱한 흙과 광물, 바스러진 뱀의 알과 곰팡이, 죽은 애벌레의 감촉을 손가락에 느꼈다. 마침내 구멍 깊숙한 곳에 숨어든 한낮의 꿈과 같이 미끈미끈한 온기에 손끝이 닿자, 교사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움찔거렸다. 잠시 후 손가락을 구멍에서 꺼낸 리우진이 이번에는 자신의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붉은 사탕을 꺼냈다. 그러더니 그것을 키 큰 소녀의 입속에 넣었다. 키 큰 소녀는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으며, 손끝으로는 입가에 묻은 침과 설탕물을 닦아냈다. (…) 교사의 입속으로, 마치 어린 시절과도 같은 혼몽하고 은은한 단맛이 퍼졌다. 교사는 손끝으로 입가에 묻은 침과 설탕물을 닦아냈다.
_113~114쪽, 「1979」에서
“나이 많은 자매는 시간을 앞서 비추어진 거무스름한 거울이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인 「도둑 자매」에는 우연히 만나 언니와 동생이 된 자매가 등장한다. 소설집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손을 잡고 걷는 소녀들. 이렇듯 꼭 쥔 두 손으로 연결된 비밀스러운 결속은 소녀들의 걸음걸음마다 환상적인 이야기로 연결된다.
소설집에서 다소 이질적인 두 작품 「뱀과 물」과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도 독특한 시간의 실체가 담겨 있다. 「뱀과 물」의 ‘김길라’를 보자. 어린 전학생 길라, 여교사 길라, 늙은 길라로 분열된 상태로, 서사는 겹겹의 꿈처럼 포개지고 엇갈리며 진행된다. 한낮에 교실에서 한 교사(김길라)가 백일몽을 꾸는 동안, 어린 전학생 길라가 학교에 왔다가 운동장에서 늙은 길라와 마주치고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미래가 자신의 과거를 죽이는 꿈, 순간과 영원의 포개짐과 엇갈림… 소설집 마지막에 놓인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는 세계 여성의 날에 ‘내’가 외국 여행지에서 할머니의 푸른 양철 가방을 들고 시낭독회에 참석하는 이야기이다. 부고에 쓰여 있는 할머니의 이름과 나의 이름이 같으며, 할머니의 여행가방이 내 손에 들려 있고, 바로 오늘이 할머니의 장례식 날이다. 나는 할머니와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할머니의 여행하는 삶을 이어받아 살고 있는 중이 아닌지.
“이제 꿈이 시작되는 건가요?”
―배수아라는 장르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앞으로 또 일어날 것이 분명한 일에 대해서 애도하는” 것이야말로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떤 사람은 문학이 단지 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문학이 필연적으로 진실을 포함한다고 생각하죠. 저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로는 단지 꿈이에요. 저에게 문학은 필연적으로 애도를 포함해요”라고 배수아는 말한다.(『문학동네』 2013년 가을호, 차미령과의 대담에서) 꿈같은, 무한한, 자유로운, 그러므로 그 어떤 서사보다 매혹적인 ‘낯섦’을 선사하는 작가 배수아. 고정된 시공간을 끊임없이 탈주하는 꿈속의 꿈속의 꿈 같은 작품들 속에서 독자들은 이번에도, 저마다 다른 풍경을 발견할 것이다. 백 명의 독자에겐 백 명의 배수아, 천 명의 독자에겐 천 명의 배수아가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배수아라는 장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