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우리 시대의 명강의 01> 삶을 바꾼 만남

<우리 시대의 명강의 01> 삶을 바꾼 만남

저자
정민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12-08-13
등록일
2015-09-25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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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어떤 만남은 운명이다!
조선시대 전방위 지식인 다산 정약용, 그의 가르침을 따라 평생을 산 단 한 사람, 황상

10여 년 연구의 결실로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생애가 입체적으로 복원되다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에 2011년 1월 3일부터 11월 21일까지 ‘우리 시대의 명강의’ 코너에서 ‘삶을 바꾼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연재되었던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의 글이 동명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정민 교수는 2004년 대한민국 인문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던 『미쳐야 미친다』를 통해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운명적인 만남을 소개한 이래, 10여 년 동안 정약용과 황상에 대한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만난 소장자들을 어렵게 설득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고 그 노력의 결실로,『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어록청상』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다산의 재발견』 등을 발표하면서 다산 정약용의 삶과 학문적 업적 그리고 그 문화사적 의미를 다각도로 밝혀왔다.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은 저자의 이런 오랜 노력의 정점을 찍는 결과물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기간은 1801년에서 1818년까지 18년 동안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조선 후기 최고의 지적 성취에 속하는 수많은 저작들을 쏟아냈다. 또한 조선시대 권력의 변방이었던 그곳 강진에서 아암 혜장과 초의 의순 등의 승려들과 교유하며 새로운 지적 흐름을 주도하는 동시에 자신의 독창적인 교육법을 통해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 제자 가운데 황상이 있다.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인문학이 귀결할 지점은 추상화된 인류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간이어야 할지 모른다. 지워진 흔적들과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꼭꼭 숨어 있는 먼지 낀 자료들을 찾아내야 하는 한문학의 길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그가 맺었던 관계들의 망을 통해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그 삶의 잊힌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은, 어렵기에 더욱 빛난다. 정민 교수는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삶을 바꾼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인간 정약용의 속살 같은 마음을 만나게 하는 동시에 끊겨 있던 흔적들을 추적하여 황상이라는 한 사람의 빛나는 삶을 복원시켜낸다.
이제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은, 독자들의 머리를 깨우고 가슴을 울릴 것이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학생은 있지만 제자는 없다’는 탄식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존경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진정한 스승도 진정한 제자도 드문 요즈음이다. 정민 교수에 의해 200년 전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그의 제자 황상(黃裳, 1788~1870) 사이에 이어진 도탑고 신실한 사제 간의 정리(情理)가 울림이 커다란 의미로 되살아난다.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인 다산 정약용은 많은 제자와 후학을 거느린 조선 최고의 석학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제자가 있었다. 신유박해 와중에 멀리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와 변변히 머물 곳도 없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던 정약용은 당시 머물던 동문 밖 주막집에 작은 서당을 열었고, 1802년 그곳에서 열다섯 소년 황상을 만난다. 시골 아전의 아들이던 황상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다산 정약용의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평생 공부에 매진했고,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한마음으로 공부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았다. 1818년 스승이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간 뒤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던 아전 노릇을 그만두고 백적동 깊은 산속에 거처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초서와 시 짓기 등의 공부를 놓지 않았으며, 늘그막에는 ‘일속산방(一粟山房, 좁쌀 한 톨만 한 작은 집)’을 지어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모두가 출세를 위해 공부할 때, 오직 황상은 스승이 입버릇처럼 일러주신 ‘유인(幽人,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조용한 곳에서 숨어사는 사람)의 삶’을 실천했던 것이다.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님께서는 이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그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날로 나는 죽은 목숨일세. 자네들 다시는 그런 말 말게.” -13쪽
스승의 말씀을 명심누골(銘心鏤骨), 마음에 새기고 뼈에 아로새기다
18년의 강진 유배 생활을 마치고 다산이 서울로 올라오자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기웃거렸다. 다산의 힘을 얻어 출세를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결국 다산의 강진 시절 수많은 책을 집필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운 이청(이학래)은 과거 시험에 도움을 주지 않는 다산에게 실망하여 추사 김정희의 문하로 들어가버렸고, 스승을 곁에서 모시며 아끼던 제자들까지도 자신에게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자 뒤돌아서 스승을 흠잡고 서울에 올라와도 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모두가 이러할 때, 홀로 묵묵히 스승의 뜻을 지킨 한 사람의 제자가 황상이다. 출세를 위한 공부는 실패로 귀결한다는 진리를 따르며 18년 동안 상경하지 않고 은자의 삶을 실천하다, 1836년 다산의 회혼례를 맞아 상경한 길에 스승과 눈물로 영결한 그는 다산의 사후에도 늘 스승의 말씀을 간직하고 허투루 살지 않았다. 이는 다산의 아들 정학연, 정학유 형제와 아름답고 돈독한 우의로 이어졌고, 이후 두 집안은 집안끼리 관계를 이어가자는 의미로 ‘정황계(丁黃契)’를 맺기도 했다.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묘를 찾아 멀리 강진에서 경기도 남양주까지 한겨울에 발을 싸매고 천릿길을 여러 차례 다녀갔다는 황상의 이 우직한 마음은 그의 글에도 오롯이 묻어났다. 엄하고 깐깐했던 다산의 교육을 견뎌내고 그 솜씨를 인정받은 황상은, 다산의 큰아들 정학연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형제, 이재 권돈인 등 당시 장안의 명류들과 교유하며 글 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그의 시를 흠모하여 제주에서 귀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강진에 들러 일속산방을 찾기도 했다. 신분의 구별이 엄격하던 시절, 시골 아전의 아들이 영의정을 지낸 이재 권돈인을 찾아가 대면하는 감동은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제주도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시 한 수를 보여주는데, 묻지 않고도 다산의 고제(高弟)인 줄을 알 수 있겠더군요. 이름을 물었더니 황 아무개라고 하였습니다. … 들으니 황모는 시문이 한당(漢唐)에 가까울 뿐 아니라 그 사람됨도 당세의 고사(高士)라 할 만하여 비록 옛날 은일의 인사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다고 합디다. 그래서 육지로 나서는 대로 그를 찾아갔더니 서울에 올라갔다고 하여 구슬피 바라보며 돌아왔습니다. 이제 내가 서울로 오니 그는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는군요. 제비와 기러기의 어긋남과 같아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424쪽 탁자 위에는 수선화 구근이 수반 위에서 막 싹을 틔워 올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자명종이었다. 온통 신기한 물건들뿐이었다. 황상은 주눅이 들어서 쩔쩔맸다. 영의정을 지낸 나라의 큰 어른이 먼 시골의 아전의 자식을 직접 초대해서 따뜻한 말씀을 건네고 있지 않는가? 믿기지가 않았다. 정학연도 추사를 대할 때와는 달리 한결 공경하는 태도로 물음에 응대했다. 이들의 대화는 수선화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나라 걱정을 지나, 시에 대한 대화로 마무리되었다. 황상이 권돈인의 분부에 따라 「무량수각에 나아가 절 올리고進拜無量壽閣」란 제목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481쪽
한 번의 만남으로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다
저자는 황상이 다산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180도 달랐을 것이라고 한다. 운명을 바꾼 만남이란 무엇일까. 스승 다산은 일관된 가르침을 주었고, 제자 황상은 한결같은 자세로 받아들였다. 다산도 위대하지만 제자도 위대한 대목이다. 황상이 있으므로 다산도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런 황상과 다산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황상이 남긴 글들이 가슴을 쳤다고 말한다. 깐깐하고 엄한 스승이었던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했던 황상을 가리켜 ‘눈물이 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시작은 다산의 「삼근계」라는 작은 글을 우연히 본 것에서 비롯했지만, 그 글에서 받은 감동은 방대한 자료 조사와 문헌 연구로 이어져, 우리에게 잊힌 사람이었던 황상과 그가 스승과 나눈 아름다운 인연을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문장들로 복원해내었다. 600쪽에 달하는 분량과 자칫 어렵다고 느낄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눈앞에 환하게 펼쳐지는 듯한 묘사와 서술, 명징한 해석은 독자들에게 깊은 학문적 즐거움과 감동의 세계를 선사하며, 황상과 다산, 저자 정민 세 사람의 ‘맛난 만남’을 음미하게 한다.
황상과 관련이 있는 필첩의 소장자를 물어물어 찾아가 그 생생한 묵흔과 마주했을 때는 감격을 가누지 못했다. 다산과 정학연, 그리고 추사 형제가 황상에게 준 여러 권의 친필첩을 보았다. 필치가 황홀했고, 내용이 눈물겨웠다. 자료가 나올 때마다 문집 내용과 맞춰보니 알 수 없던 여백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다산과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는 일은 내 몫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찌하겠는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와버린 것을. … 이 책에서 살핀 황상의 삶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눈으로가 아닌 당시의 시선에서 볼 때도 그랬다. 이름 없는 시골 아전의 아들이 멋진 스승과 만나 빚어낸 조화의 선율은 그때도 많은 사람을 열광케 했다. 더벅머리 소년이 스승이 내린 짧은 글 한 편에 고무되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가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글을 열며’ 중에서
스승 정약용, 인간 정약용의 얼굴
문장과 경학(經學)에 두루 뛰어난 학자였던 정약용은 유형원과 이익 등의 실학을 계승하고 집대성한 18세기 선구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신유박해 와중에 혈족이 죽거나 유배되는 갖은 고초를 겪었고 강진에 유배 와서도 식구들과 헤어져 마음 둘 곳도, 몸 머물 곳도 없이 외롭고 고단한 나날을 견뎠다. 학질에 시달리고 중풍과 마비가 오락가락했다. 해배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다산초당에 거처를 정할 때까지 머물 곳도 마땅치 않았다.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재 머무는 공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다산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는 얼마나 더 머물지도 모를 이학래의 사랑채 바깥 채마밭에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사시장철 푸른 대나무의 소쇄(瀟灑)한 기상을 울타리 삼아 둘러두고 싶었다. 이웃은 그까짓 대나무는 산골짜기에 가면 쌔고 버렸는데, 뭐하러 아깝게 채마밭에 옮겨 심느냐고 혀를 찬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몇 그루 대나무라도 둘러두고, 이쯤에서 타협하고 싶은 내 마음을, 자꾸 허물어지고 물러지는 정신을 다잡고 싶었던 것인 줄을 말이다. -297쪽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지 않았다. 무너져내리는 마음과 아픈 몸을 추스르며 아이들을 가르쳐 성장시켰고, 자신의 학문도 쌓아갔다. 우리가 잘 아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대표작은 모두 강진 유배 시절에 쓰인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학자로서의 다산의 모습 뒤에는 참으로 인간적인 다산의 모습 또한 엿볼 수 있다. 다산은 자애로운 모습의 스승만이 아니었다. 좋을 때는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이지만, 매서울 때는 한겨울 칼바람 같았다. 학질(말라리아)에 걸려도 붓을 놓지 않고 공부를 하던 황상에게 시를 지어주며 칭찬하다가도(“너는 이 두 분보다 나이가 훨씬 어리건만 학질에도 눕지 않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구나. 그 고집스런 뜻이 선현에 못지않으니 참 장하다.”_84쪽) 혼인을 한 뒤 공부가 게을러진 제자를 매섭게 나무라며 부부가 각방을 쓸 것을 종용한다(“내가 너를 몹시 아꼈으므로 마음속으로 슬퍼하고 탄식한 것이 오래다. 진실로 능히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뜻을 고쳐 내외가 따로 거처하도록 해라. 마음을 오로지하여 글공부에 힘을 쏟을 수 없다면 글이 안 될 뿐 아니라 병약해져서 오래 살 수도 없을 터.”_138쪽). 또 황상의 아버지인 황인담이 장례에 대한 절차를 다 갖추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혼란스러워하는 황상에게 여러 통의 짧은 편지글을 통해 호통을 친다(“네가 날마다 침실에서 편안하냐? 네가 하루에 두 끼 밥을 먹으면서도 편안하냐? 윤리에 어긋나고 의리를 벗어나 어버이를 잊고 죽은 이를 저버린 죄는 그 법이 지엄하다. 네가 살아 천지간에 살고 싶으냐? 네 나이가 스물이다. 집안일은 네가 마땅히 주장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너는 마땅히 아침저녁도 먹지 않고 한번 죽기만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즉각 행하지 않고 편안하게 배불리 밥 먹는다면 내가 이 같은 사람을 다시는 대면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말한다.”_274쪽). 18년 만에 상경하였던 제자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이 이별이 영결이 되리라는 생각에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선물을 챙기며 마지막 절필을 남긴다(“꾸러미 안에는『규장전운』 작은 책자 한 권과 중국제 먹과 붓 하나, 부채 한 자루와 담뱃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엽전 두 꿰미는 따로 묶여 있었다. 다산의 꼼꼼함이 이러했다. 그는 제자가 먼 길을 돌아갈 때 배를 곯을까봐 여비까지 따로 챙겨두었다. 황상은 못난 제자에게 주려고 의식이 혼미한 중에도 힘겹게 글씨를 썼을 스승을 생각하며 울음을 삼켰다”).
送黃子中 황자중에게 준다
奎章全韻一件 『규장전운』 한 건
唐筆一枝 중국 붓 한 자루
唐墨一碇 중국 먹 한 개
扇子一把 부채 한 자루
烟杯一具 연배 한 개
路費 錢二兩 여비 돈 두 냥
한편 이 책에서는 채마밭을 일구고 싶다는 토로, 『아학편兒學編』을 지어 가르치며 천자문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강진에 유배를 와 있음에도 돈을 조금씩 모아 열여덟 마지기의 토지를 소유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실학자로서 다산의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또 멀리 떨어진 어린 아들들에게 ‘격물치지 공부법’을 말하며 “헝클어진 문서를 탁탁 쳐서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맞추는 듯”이 공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공부를 챙기는 아버지로서의 모습도 따뜻하게 다가온다.
첫 의문은 다소 엉뚱하고 작은 데서 출발했다. 작은 의문을 계통을 갖춘 지식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을 실례를 들어 보여주었다. 다산은 이것을 ‘격물치지의 공부’라고 했다. 격물은 사물을 바룬다, 즉 무질서한 사물을 가지런하게 정돈한다는 의미다. 헝클어진 문서를 탁탁 쳐서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맞추는 것이 바로 격(格)이다. 이렇게 정돈하고 보면, 앞서는 잘 보이지 않던 의미가 반듯하게 드러난다. 사물을 바루어서 앎에 도달하는 공부가 격물치지다. -231쪽
요즘 사람들은 아무도 스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모든 관계들이 이해득실로 정의되는 시속을 한탄하며 정민 교수는 한 사람을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바친 황상의 사람됨과, 그 마음을 알아주고 제자에게 바른 가르침을 주고자 노력한 다산의 스승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조명하고자 했다. 서로 격을 갖추어 엄정하되 믿음으로 진실되게 이루어진 이들의 만남은 한겨울 옷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처럼 읽는 이들의 마음을 다시금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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