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어둠
“이성과 빛으로 가득 찬 르네상스의 환상에서 벗어나자”
“끊임없는 전쟁으로 얼룩진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사람들은 흔히 ‘르네상스’ 하면 미개했던 중세의 어둠에 가려진 그리스 로마 문명을 되살리는 문예부흥 정도로 알고 있다. 뛰어난 예술 천재들이 나와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이탈리아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는 게 일반적인 역사적 통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고전 문명이 미친 영향은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 분야로 국한되었다. 정치ㆍ경제ㆍ군사ㆍ사회 면에서 그리스 로마적인 부활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시민이 중심이 된 민주정치는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상 르네상스 당시 유럽은 1년 365일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 없이 편안하게 예술 활동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르네상스가 한창인 15세기와 16세기,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은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잔인한 살육이 자행되던 피의 바다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어둠》은 ‘예술, 약탈, 해적, 전쟁, 흑사병, 종교개혁, 과학, 마녀, 노예, 제노사이드, 제국주의’라는 11가지 주제를 통해 이성과 빛으로 가득 찬 르네상스의 환상을 통렬히 깨트리고 우리에게 진실된 유렵의 역사를 조명해준다.
“해적단의 약탈과 노예무역이 남긴 인종차별의 역사”
16세기 유럽인은 누구 할 것 없이 외부의 이슬람 세력을 두려워했다.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은 막강한 힘으로 유럽의 동부 내륙까지 파죽지세로 쳐들어와 유럽인을 공포에 떨게 했다.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단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물론 전 유럽의 해안 지대를 돌면서 인신매매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바르바리 해적단의 약탈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300년간 계속되었으며, 그 기간에 납치된 유럽인은 무려 125만 명에 달했다. 이처럼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르네상스 시절의 유럽인들은 오스만제국이나 바르바리 해적단이 쳐들어와 언제 그들에게 납치당해 노예로 팔릴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그런 와중에 유럽인들은 후대의 역사에 길이 남을 범죄를 저질렀다. 16세기 들어 대서양 건너 그들이 새로 정복한 신대륙에서 일할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 멀리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 끌고 갔던 것이다. 신대륙에 정착한 흑인 노예들과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착취하는 백인 노예주들의 문제는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는 골칫거리인 인종차별의 불씨가 되었다.
“르네상스를 찬란한 이성의 시대로 오해하는 까닭”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르네상스 시기를 가리켜 “찬란한 이성의 시대”라고 찬양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가지게 한 장본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들은 다름 아닌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유럽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중세 시대를 폄하하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를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서면 서구 지식인 사이에는 기독교 신앙이 아닌, 이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싹튼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배타적이고 비합리적인 신앙에 매달리기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사회를 발전시켜 자신들의 세계가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둘째, 계몽주의 시대 유럽을 주도한 영국과 프랑스 같은 주요 강대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18세기 무렵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 인도,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식민지를 건설한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거의 1000년간 유럽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던 그들이 유럽을 벗어나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을 넘나드는 제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서구 지식인의 바람과는 반대로 르네상스 시기 유럽인들이 가는 곳마다 폭력과 혼란이 수출되었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인종 학살과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발단도 따지고 보면 르네상스 시대에 벌어진 과도한 해외 식민지 개척 경쟁에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르네상스 시기 유럽이야말로 비이성과 부조리함이 판을 치던 진정한 암흑의 대륙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