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죽어가는 초고령 노인을 ‘관리’하고 길들이려는 의료환경에 좌절하고
현실감각을 서서히 잃어가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묵묵히 갈며
언젠가 내게도 무심히 닥칠 늙음과 죽음을 생각하며 보낸 3년 반의 기록
이 책은 어느 날 갑자기 아프기 시작해 급격히 허물어진 아버지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의 시간을 적나라하게 경험한 아들의 기록이다. 저자 이상운은 제11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고, 현대사회의 인간군상을 예리하게 묘사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 들어선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종합병원과 요양병원을 찾지만, 죽어가는 인간을 ‘관리하고 길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차가운 의료환경 속에 극도로 불안해하는 아버지를 맡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불편한 병원 침대 위가 아닌 “당신 집의 당신의 이부자리”에서, 익숙한 “삶의 터전과 감정적 유대”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돌보기로 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은 당사자인 아버지에게도 첫 경험이지만, 그 곁에서 도움을 주는 저자에게도 철저히 첫 경험이었다. 그는 이 특별한 3년 반의 여정을 통해 노화, 질병, 죽음의 고통으로 무너져가는 인간의 애처로운 모습과 그 속에서 발하는 아버지와의 애잔한 교감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더불어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일의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비롯해 사회적 제도적 열악함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닥칠 그 죽음의 과정에 대비해 무엇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지 현실적이고도 날카로운 사유를 보여준다.
어느 날, 고령의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원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고령의 부모님이 갑작스레 발병해 입원한다면, 치료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받아야 할까? 가족이나 보호자는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할까?
저자와 그 가족은 고열이 나면서 아프기 시작한 고령의 아버지를 치료하고 돌보기 위해 으레 그러듯 종합병원을 찾는다. 병원의 전문가들이 잘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마음을 놓는 것도 잠시, 상황이 혼란스럽게 돌아간다. 노쇠한 몸 곳곳에 주삿바늘이 꽂히고 이런저런 약물이 공급되는 와중에, 잔뜩 겁먹은 아버지는 주삿바늘을 잡아빼며 퇴원을 요구하고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해 모두를 가슴 졸이게 한다. 게다가 “아야! 아야!” 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병원 생활중에 팔다리는 급격히 무력해졌다. 쇠약한 노인에게 온갖 검사를 지시하던 의료진은 명쾌하게 발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저자는 퇴원을 결심한다. 두 발로 걸어 병원에 간 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저자는 아버지의 몸과 정신이 다 망가지고 나서야, ‘섬망’이라는 정신과적 증세 때문에 아버지가 이상한 소리를 냈고, 고령 노인이 입원하면 물리치료사를 붙여 팔다리 근육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많은 진료 과목을 갖췄다는 이유로 ‘종합병원’이라는 이름을 달고서는 정작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무너져가는 노인을 종합적으로 진단하지 못하는 실상에 저자는 허탈함과 좌절감을 느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미 죽음의 길에 들어선 고령의 아버지에게 괴로운 연명치료 대신, 인간적이고 안정적인 마지막 여정을 준비해드리기로 한다.
아버지는 왜 열이 펄펄 끓는지 오로지 그것과 관련해서만 진료와 처방을 받았다. 정신과적인 문제가 생기고 있고, 소변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고, 다리 근육이 급속히 무력해지고 있는 등속의 문제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다. (…) 고령의 환자는 특히 종합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하나의 두드러진 질환을 치료하는 동안, 알아차릴 수 있게 발병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부실해진 다른 부위가 그 틈을 타 급속히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_본문 67쪽
노화와 죽음마저 위생적으로 포장되는 시대
필요한 건 상조 광고가 아니라 죽어가는 자를 ‘제대로 돌보는’ 일
저자는 늙고 병든 사람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제도적 미흡함을 상업자본이 맹렬히 이용하는 세태에 다시 한번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요양병원이다. 깨끗하고 편리해 보이기 때문에 그곳에 맡기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저자는 요양병원이 결코 만능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역시 한동안 집에서 아버지를 간병해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 요양병원을 찾지만, 그의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입원 후 일주일간 면회 금지”라는 병원 관계자의 말이었다. 낯선 곳에서 강압적으로 길들여져 좁은 침대 위에 식물처럼 누워 지낼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가 누리는 편리함은 적은 대가와 고된 노동을 감내하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간병인들 덕분이라는 사실도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이렇게 저자가 경험하는 일련의 일들은, 정작 도움이 필요한 것은 5일이면 끝나는 장례가 아니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늙음과 죽음의 과정이며, 그 곁을 지키는 이들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더불어 저자는 빈집을 가정집으로 개조한 공간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일본의 간병 시스템을 소개하면서, 인간적으로 늙고 죽는 일에 대한 사회적 고민과 제도적 뒷받침을 거듭 강조한다. 죽어가는 자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현실적 시스템이 부재하다면 늙어가는 인간은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대부분의 경우 노인이 병들어 스스로 유지하는 게 어려워지면 즉각 요양병원으로 보내버린다. 가족은 그곳 시스템에 모든 것을 일임해버리고 관심을 떼버린다. 그러나 그처럼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앞둔 병든 노인에게서 그의 오래된 감정적 유대를 단번에 절단해버리는 방식은 참으로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잔인한 짓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러한 방식이 가지고 있는 잔인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_본문 127쪽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며
곧 내게도 닥칠 죽음을 생각하다
저자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무너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과연 인간이 존엄을 지키면서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고민에 빠진다.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애잔함을 불러일으키지만, 추하게 망가져가는 육체와 정신 역시 그 여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구급차, 자주 갈아줘야 하는 대소변 기저귀, 늘어지고 물러지는 피부, 점점 사라지는 현실감각… 이 모든 일들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것이 바로 죽음의 과정이다. 따라서 저자는 죽음이 결코 순간의 일이 아님을 일깨우며 늙고 죽어갈 자신의 모습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준비해둘 것을 권한다. 우리나라 노인이 병석에 들어 죽기까지 평균 병치레 기간이 7년에서 10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더 오래 살 수 있게 된 만큼 더 많이 그리고 더 유별나게 노화와 죽음의 시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늙고 죽어가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시기가 왔음은 자명하다.
긴 생애를 살아내고 이제 그 마지막 길에 들어선 아버지의 육체와 정신은 저자에게 많은 질문을 내놓았다. 그는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질문들에 응답하고자 애썼고, 인간의 늙음과 죽음에 대해 객관적 배움과 마음의 가르침을 얻었다. 이것은 도통 말이 없던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