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진보와 보수, 아나키스트에서 사회주의자까지
다양한 이념과 사상의 각축장이었던 스페인
그들의 다채로운 근현대사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나다
이 책은 스페인 현지에서 생활하는 저자가 직접 보고, 느낀 스페인 근현대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단순히 참고 서적이나 기타 사료를 바탕으로 쓴 스페인 역사서들과 달리, 자국 역사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생각을 생생히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스페인의 왕이었던 페르난도 7세의 경우 다소 교활하고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승부에서 이기고자 하는 욕심도 많았다. 예를 들어 그가 당구를 칠 때면 함께 치는 사람들이 페르난도 7세가 치기 좋게 일부러 실수를 하며 좋은 위치에 공을 배치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당구를 칠 때 상대방이 점수를 올리기 쉽도록 배치해 주면 “페르난도 7세에게 해 주듯 공을 놔 주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스페인 역사상 감추고 싶은 사건 가운데 하나인 악명 높은 종교재판에 관해서도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관점과는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흔히들 스페인의 종교재판으로 수많은 사람이 제대로 변론조차 하지 못한 채 화형당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스타프 헤닝센 교수에 따르면 1540년과 1700년 사이에 열린 44,674건의 종교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는 1,604명뿐이었다. 그나마 실제로 사형을 당한 사람은 826명이고, 778명은 사람 대신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을 태웠다.
스페인 근현대사가 한국의 근현대사와 비슷한 면이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권력층의 무능함과 비리, 변화를 거부한 민중들로 인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나폴레옹의 지배를 겪게 되는 과정은 조선 말기의 상황과 유사하다. 좌파와 우파의 극심한 대립으로 스페인은 내전을 치렀고, 한국 역시 6·25 전쟁을 겪었다. 스페인은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한국과 무척이나 유사한 길을 걸었다. 따라서 스페인의 역사는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스페인 역사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과 해석은 무적함대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이 어째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열강과의 경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를 통해 독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스페인 역사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사와 스페인의 근현대사가 묘하게 겹쳐 보이는 흥미로운 경험도 할 수 있다.
스페인 근현대사의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통해
드라마틱한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를 배우다
저자는 펠리페 2세부터 프랑코 독재 정부까지의 스페인 역사를 다루면서 정사뿐만 아니라 흥미진진한 야사도 함께 소개한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 옆에는 오늘날에도 단추 제조자의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 길에는 바람둥이 왕으로 알려진 펠리페 4세와 왕비 이사벨 데 부르봉과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다. 왕비는 여느 때처럼 정부에 빠져 있던 펠리페 4세에게 여자와 헤어지라고 엄숙하게 경고했다. 펠리페 4세는 프랑스 왕실과 친인척 관계로 이어져 있는 왕비의 경고를 무시하지 못하고 애인과 헤어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왕궁 근처에 별도의 집을 마련해 여전히 두 사람은 밀회를 즐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단추 제조자의 길에 모여 살던 단추 제조자들에게 몰래 왕의 애인이 여전히 왕궁 근처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를 가져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추 제조자들은 당시로서는 고가의 물품이었던 단추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귀족을 비롯한 고위층과 접촉이 잦았고, 이를 통해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단추 제조자들은 일급 정보원들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원래는 마드리드 왕궁 내에 있던 조각상들을 모두 오리엔테 광장으로 옮기게 된 일화라든가 하얀 천이 안 좋은 광선을 내뿜는다는 생각에 궁전의 흰 천이란 천은 모두 치워 버린 펠리페 5세의 광기, 왕이라는 신분에도 포르노 제작에 빠져 있었던 알폰소 13세의 자유분방함 등 기존의 스페인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지인만이 아는 뒷이야기들이 생생히 펼쳐진다. 특히 저자가 단추 제조자의 길처럼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현지 장소를 직접 방문해서 촬영한 사진 자료가 실려 있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역사적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책 속으로
보통 마르가리타 공주가 단명한 이유로는 이 같은 무리한 출산 및 유산과 더불어 근친 간의 결혼으로 태어나 몸이 약했다는 이유를 꼽는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림에서 마르가리타 공주의 왼쪽을 보면 시녀인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가 조그만 도자기병을 공주에게 건네고 있다. 그 도자기병 안에는 17세기 귀족 여인들이 얼굴을 하얗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던 비밀의 명약이 들어 있었다. 그 명약은 바로 향수를 섞은 진흙이었다. 17세기에 사람들은 진흙을 먹으면 얼굴이 하얘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시기 여자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매일 작은 도자기 분량의 진흙을 먹었다.
- 본문 121~122쪽
펠리페 5세는 1728년 이후부터는 아예 밤낮을 완전히 바꾸어서 생활했다. 그는 자정에 회의를 시작하고 저녁을 새벽 5시에 먹었다. 그리고 7시부터 잠자리에 들어 12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해가 지면 하루를 시작했다. 신하도 왕비도 그의 생활 리듬을 쫓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말년에 그는 우거지상을 하고 다녔고, 정신병 증세가 심해져 스스로 물기도 하고, 노래하고, 괴로움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고, 옷은 이사벨 왕비가 입었던 옷만 입었다. 다른 옷은 독이 묻어서 입으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갑자기 입고 있던 옷을 집어 던지고 알몸으로 걸어 다녔다. 펠리페 5세는 상태가 점점 안 좋아져서 이사벨 왕비와 큰 소리로 다투기도 했고 때로는 그녀를 때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떨 때는 왕궁을 탈출하려고도 했다. 왕비는 그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경비를 두어 왕을 감시했다. 언제나 왕관을 내려놓고 쉬고 싶었던 펠리페 5세는 1746년 7월 9일 죽어서야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늘 왕위를 내려놓고 싶어 했던 펠리페 5세는 45년 3일을 왕위에 있으면서, 스페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왕으로 기록에 남았다.
- 본문 158쪽
부지런하고 똑똑한 군주였던 카를로스 3세가 보기에 카를로스 왕자는 왕이 되어 나라를 이끌기에는 부족해 보여서 걱정이 많았다. 이는 펠리페 2세가 펠리페 3세를 보며 한탄을 할 때와 비슷했다. 펠리페 2세는 그 마음을 펠리페 3세에게 전하지는 않았지만, 카를로스 3세는 직설적인 면이 있었다. 어느 날 궁정에서 연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카를로스 왕자가 카를로스 3세에게 물었다.
“아버지, 이해 안 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만약에 모든 왕이 신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다면, 어떻게 나쁘고 멍청한 왕이 있을 수 있는 건가요? 모두 현명하고 좋은 왕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카를로스 3세는 아들을 한번 쓱 내려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그 멍청한 게 바로 너란다.”
- 본문 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