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학 강의
화가가 보여주고 철학자가 답한다!
반 고흐와 하이데거, 푸코와 마그리트, 들뢰즈와 베이컨……
철학자 여덟 명의 이론을 통한 근대미학의 개념 틀 재검토
“많이 거론된 책은 일단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기를 좋아한다.” 발터 베냐민의 말이다. 이 책에는 이제는 유행이 지난 듯한 푸코, 들뢰즈 등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과 언뜻 보아 그들과는 별 관련이 없을 듯한 베냐민과 아도르노, 하이데거의 사상이 소개된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근대미학의 한계를 비판하는 사상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특히 베냐민은 우리가 아는 탈근대 철학의 거의 모든 주요한 개념들을 선취하고 있다. 근대미학의 주객이원론, 모방이론, 재현의 진리 등은 베냐민의 사상 속에 산산이 부서진다. 이제 주체가 있던 자리에는 다양한 맥락 가운데 해석의 자유가 펼쳐지고, 원본의 권위가 있던 자리에는 복제의 연쇄가, 재현의 진리가 있던 자리에는 형태와 색채의 유희가 들어선다.
한데,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관계를 물질들의 관계로 왜곡시킨다. 이 체제는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환원해 다양한 개별자를 획일적으로 통분해버렸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삶의 격률이 되었다. 근대예술은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립과 투쟁, 불화에서 눈을 돌리고, 화해 불가능한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의 대결을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허구로 보충하려는 시도였다(1장 「베냐민-알레고리와 멜랑콜리」, 2장 「하이데거-진리의 신전」, 3장 「아도르노-진리, 가상, 화해」, 4장 「데리다-회화 속의 진리」.)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거짓말에 기댈 수 없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체제 내에 포섭하려는 자본주의에 맞서 예술은 끊임없이 탈주를 행한다. 그래서 현대예술은 낯설다. 미술은 보이지 않고, 음악은 들리지 않으며 예술 감상은 더 이상 즐거운 체험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절대적 부정을 통해 예술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증언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유토피아를 그리워한다. 또한 우리는 한없이 외로워진 미술과 음악에 말을 걸기 위해서는 철학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현대예술은 철학과 비평을 동반하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3장 「아도르노-진리, 가상, 화해」.)
예를 들어 르네 마그리트,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푸코의 철학을 바탕으로 유사와 상사라는 개념을 설명할 수 있다. 유사는 원본을 전제로 한 복제이고 상사는 원본이 없는 복제(시뮐라크르)다. 유사는 원본의 권위에 의지하지만 복제의 복제인 상사는 이런 위계가 없다. 상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주려 하는 마그리트의 그림은 19세기까지의 유럽회화의 전통인 유사성을 통한 재현(원본을 얼마나 닮게 그리는가), 재현을 통해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선언하는 주체의 권위에 도전한다. 재현의 독재에서 벗어난 예술은 확대된 상상력으로 더욱 풍요로워진다(5장 「푸코-위계 없는 차이의 향연」.)
그렇다면 재현을 포기한 회화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것이 감각이라고 말한다. 베이컨의 기괴한 신체, 고깃덩어리는 고요한 관조(고전주의 미학)가 아니라 충격 효과를 준다. 또한 인간도 동물도 아닌 명확히 알 수 없는 형태들은 이성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린다. 푸줏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는 렘브란트의 작품이 그렇듯이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러한 인간의 ‘동물-되기’를 퇴행이보다는 ‘창조적 역행’으로 여기고, 기관의 분화가 사라지는 데에서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유목적 주체의 가능성을 본다(6장 「들뢰즈-감각의 논리: 새로운 유물론 미학의 정초」.)
한편 원본을 전제하지 않는 현대미술, 이 시뮐라크르의 세계 반대편에는 숭고의 미학에 승부를 거는 예술가들이 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우리가 묘사할 수도 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숭고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은이가 보기에 숭고의 미학은 시뮐라크르 미학과 함께 현대미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현대미학은 서로 대립하며 보완하는 이 두 개념의 지지를 받는다. 대량복제 된 산물을 예술에 끌어들인 뒤샹과 워홀 등의 작품이 시뮐라크르로 설명된다면 바넷 뉴먼의 작품은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이 세상에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증언하는 숭고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장 보드리야르의 철학이 놓인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예술은 종언을 고했다. 차이의 생성이 극점을 지나면 동일자의 지루한 무한증식을 낳듯이 도처에서 증식되는 예술 속에 진정으로 새로운 사건은 없다. 오직 자기 동일성의 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미적 가치가 예술 밖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어 미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변별성이 사라져 예술은 불필요해졌다. 이제 예술은 열역학에서의 열사망(熱死亡)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예술이 그렇게 사라졌고 역사는 끝났다는 것이다(7장 「리오타르-형언할 수 없는 숭고함」, 8장 「보드리야르-스캔들이 말하는 것」.)
『현대미학 강의』는 베냐민의 언어 타락을 통한 역사의 시작으로 시작해 보드리야르의 역사의 종말로 끝난다. 하지만 과연 끝일까? 진중권은 실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 사막의 원시적 숭고함처럼 보드리야르의 ‘사라짐’ 또한 역설적으로 숭고의 미학에 합류한다고 보며, 종말이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사건으로 전화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