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창
어쩌면 그 여자였는지 모른다.
노트르담 성당 안에서 본 그 검은 옷의 여자. 처음엔 일본인이라 생각했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므로 꼭이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성당의 안쪽 벽면에 나 있는 장미의 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오 일 후에 나는 베네치아의 산타 루치아 역 앞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녀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관람하기 위해 그때 그곳에 가 있겠다고 했다.
그래, 그럴 리 없지. 그녀가 지금 파리에 있을 리가 없지.
장미의 창에 이르러 나는 그만 발이 멎고 말았다. 좌우는 아담과 이브상으로 각각 장식돼 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마치 홀연한 계시의 순간을 맞고 있는 성싶었다.
그렇다, 장미의 창이라 불리우는 스테인드 글라스였다.
그때 왜 이 년여 전 신촌의 컴컴한 화장실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른다.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발정난 원숭이들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가 절정의 순간에 짐짓 고개를 비틀고 그녀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던 스테인드 글라스, 그 희미한 빛이 말이다.
암스테르담과 브루셀을 다녀오느라 파리에서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한 셈이에요. 하지만 이제와서 어쩌겠어요. 그렇죠?
뜻을 잘 모르면서 나는 그렇다는 시늉을 했다.
그래요, 그곳에 가자고 한 이유가 분명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뭔가 아쉬워요, 많이.
어쩌면 생의 또 사무친 한순간이 그때 눈앞에서 미처 손쓸 수 없이 지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숱한 암시의 뒤척임 속에서, 불확실한 증거의 안타까움 속에서. 그리하여 나는 축축한 새벽에 이국의 한 아파트 문간에서 그녀와 서로 눈빛을 피한 채 헤어졌다.
검은 망토에 흰 가면을 쓴 너희 빈 집들이 여기 이 안개 낀 골목길을 뚜벅뚜벅 걸어다니고 있군. 때로 스치듯 만나 골목의 축축한 벽에 기대어 서로 속삭이고 있군. 그런데, 무슨 암시라도 되는 양 어떻게든 거머쥐고 싶어지는 생의 한순간이 불현듯 찾아오기라도 하면 나는 얼굴도 모르는 네게 뭐라고 하지? 해골처럼 검게 뚫려 있는 네 두 눈을 보며. 그저 네 빈 집에 들어갔다가 잠깐 장미 창을 보고 나왔다고 하나? 하지만 그건 너무 늦은 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