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처럼 낯선
김수정. 서른네 살. 상의, 밤색 재킷. 하의, 보라색 치마. 신발, 흰색 구두. 연락 주신 분 후사함. 명함판만한 흑백사진은 틀림없이 옥주였다. 옥주는 입술을 길게 벌린 채 약간 웃고 있다.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 보였다. 팬케이크처럼 둥글고 납작한 얼굴. 김수정이라는 이름도 서른네 살이라는 나이도 사실이 아니다. 이름과 나이는 다르게 기제되어 있었지만 사진 속의 여자는 옥주임이 분명했다.
나선형의 은하수를 정면으로 보신 적 있으십니까. 천억의 별들이 서로 강력한 중력으로 결합되어 중심을 돌고 있고, 몇몇 다른 별들은 더 넓은 궤도로 옮겨갑니다. 태양은 나머지 수행원들과 함께 멀리 떨어진 은하 중심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삼억 광년에 한 번씩 회전합니다. 우리 은하와 동족의 외부 은하들은 저 멀리 공간 밖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들 역시 표류하면서 천천히 회전합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장 밝은 별들과 성운만을 볼 수 있는 것일 테지요……. 아아,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랜 전 기억이 그녀를 후려내려는 순간, 그녀는 질끈 눈을 감는다.
붉은색 권투장갑. 그것은 차갑고 단단했다. 낯선 그 거리의 스포츠용품점을 지날 때 진열대의 붉은 권투장갑을 왜 그냥 지나쳐버리지 못했던가. 마치 이런 날이 예정되었던 것처럼. 그녀는 먼저 왼손에 장갑을 끼웠다. 오른손을 끼울 땐 목과 가슴 사이에 장갑을 고정시켜야 했다. 권투장갑은 혼자 끼우기 어렵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는 혼자 두 손에 장갑을 꼈다. 끈만은 혼자 묶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권투장갑을 낀 채 다시 바닥에 누웠다. 손은 신체 중에서 가장 자유롭고 제지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손은 위험하다. 믿을 수 없다.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함부로 폭력은 쓰고 싶지 않아. 결정적일 때, 그런 때가 있을 거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