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위대한 쇼맨
- 저자
- 피니어스 T. 바넘
- 출판사
- 아템포
- 출판일
- 2017-12-22
- 등록일
- 2018-06-11
- 파일포맷
- EPUB
- 파일크기
- 0
- 공급사
- 북큐브
-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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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중은 자신이 속는 줄 알면서도
즐거워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 〈위대한 쇼맨〉의 실존 인물
바넘 효과, 언론 플레이의 귀재, 노이즈 마케팅의 원조만으로는
지상 최대의 쇼맨 P. T. 바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지상 최대의 쇼맨이자 사기꾼으로 불리는 바넘
이 책은 19세기 미국의 서커스를 ‘지상 최대의 쇼’로 홍보하여 크게 성공한 흥행의 귀재이자 ‘지상 최대의 사기꾼’ 혹은 ‘야바위의 제왕’으로 불린 쇼 비즈니스의 선구자 P. T. 바넘의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계산에 밝고 진취적이며 몸보다는 머리 쓰기를 좋아했던 저자의 성장 과정과 서커스, 동물 쇼, 기형인 쇼, 수족관, 박물관 등 상상을 초월하는 공연과 홍보로 큰 성공을 거둔 이면의 기획 배경과 진실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기획한 공연이 그랬듯 자서전 역시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는데, 원서가 출간된 당시 자신의 사업 일부가 날조였다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대중을 속인다는 것보다 대중이 즐거워한다는 것에 더 가치를 둔 점에서 그의 자신감과 당당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미국의 제45대 대통령 트럼프는 자신에게 붙은 수많은 별명 중 바넘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단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번창하고 한 나라의 대중문화가 전 세계로 순식간에 전파되는 오늘날, 바넘의 서커스는 사라졌지만 엄청나게 크다는 의미의 ‘점보’라는 말과 ‘바넘 효과’의 창시자이자 ‘광고의 아버지’, ‘홍보의 셰익스피어’ 등으로 불린 그의 쇼 비즈니스의 핵심적 가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19세기 이민자들의 용광로 같았던 도시 뉴욕에서 누구보다 뜨거웠고 서부개척시대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점원, 지배인, 쇼맨, 사기꾼 은행원, 죄수 등 종횡무진으로 스펙터클했던 한 남자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남북전쟁으로 국가의 기틀이 잡혀가던 무렵의 모순적 인물이자 문제적 인간이었던 바넘은 대중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간파하고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하여 자신의 공연 사업을 번창시켰다. 바넘은 날조와 속임수로 돈을 버는 일에 과도하게 집착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그는 공연이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을 때는 계약조건과 상관없이 함께한 이들과 수익을 나누어가졌으며,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작태와 배금주의자들을 증오했다. 영매나 심령술도 사기행위라며 혐오했고, 금주운동가였으며, 노예제 폐지와 참정권을 주장하기도 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풍부한 도판
이 책에서는 바넘이 살았던 시기에 막 꽃피운 광고와 대중문화의 ‘맨얼굴’을 엿볼 수 있다. 원서에 있는 삽화를 비롯하여 바넘이 직접 홍보하며 기획했던 당시의 포스터와 등장인물들의 사진을 풍부하게 담고 있어 본문의 이해를 돕는 동시에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저자소개
지은이 피니어스 T. 바넘(Phineas T. Barnum, 1810-1891)
1810년 미국 코네티컷주의 작은 마을 베설에서 태어났다. 장난과 농담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와 마을 주민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머리 쓰는 일은 좋아하되 육체노동은 몹시 싫어하는데다 고정적인 월급쟁이보다는 한 방을 노리는 모험적이고 투기적인 성향을 보였다. 19세에 채러티 홀릿과 결혼하고 20대 초반에는 자신의 기질에 맞게 직접 가게를 운영하면서 복권 판매를 겸하는 등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1834년에 가게를 팔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고정급보다는 능력과 노력에 맞는 보상을 원하며 구직 활동을 펼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835년에 흥행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늙은 노예 조이스 헤스의 전시권을 사들여서 161세라고 대중에게 소개했다. 1836년 조이스 헤스가 죽자 실제 나이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지만 대중은 오히려 바넘의 편을 들었다. 순회 전시 공연인 ‘바넘의 대(大) 과학 및 음악 극장’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837년부터 미국 경제 침체로 바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841년 우여곡절 끝에 스커더의 아메리카 박물관을 인수하여 바넘의 아메리카 박물관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박물관은 건물 리모델링뿐 아니라 전시물과 공연 프로그램의 다각화로 뉴욕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바넘은 흥행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각종 공연과 전시의 발판으로 아메리카 박물관을 활용했다. 1842년에 전시한 ‘피지 인어’는 바넘이 장차 펼치게 될 주요 조작극의 시발점이 된다. 찰스 스트래턴이라는 난쟁이를 ‘톰 섬 장군’이라는 예명으로 대중 앞에 선보인 후, 1844?45년 톰 섬 장군과 함께 유럽 순회공연에 나섰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는 등, 톰 섬 장군은 유럽의 여러 왕실에서 큰 호응을 얻으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850?52년 톰 섬 장군과의 유럽 순회공연중에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로 유럽에서 인기 절정에 오른 성악가 제니 린드의 소문을 듣고, 공연 1회당 1,500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니 린드와의 미국 공연을 성사시켰다. 결국 제니 린드의 미국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고 바넘은 흥행사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샴쌍둥이 창과 엥, 일명 ‘지프 더 핀헤드(Zip the Pinhead)’로 유명한 윌리엄 헨리 존슨, 여자 거인 앤 스완, 제2의 톰 섬인 너트 제독 등의 공연자들도 계속 발굴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870년 60세의 바넘은 위스콘신 출신의 사업가 윌리엄 C. 쿠프와 함께 ‘바넘의 대(大) 이동 박물관, 동물원, 카라반&서커스’를 창단했다.
이 서커스단은 2017년 마지막 공연까지 146년 동안 서커스의 살아있는 역사로 군림했는데, 1881년에는 제임스 베일리와 제임스 L. 허친슨의 서커스단과 통합하여 ‘바넘&베일리 서커스’로 거듭났다. 바넘은 런던 동물원에서 구입한 아프리카산 코끼리 ‘점보’를 비롯해 이동동물원 때와 비슷한, 요컨대 곡예, 기형인 쇼, 톰 섬 장군 공연 등을 선보였다. 화재, 기차 사고 등 여러 곤경을 겪으면서도 바넘은 공연자들과 힘을 합쳐 서커스단을 운영해나갔다. 이후 바넘의 서커스단은 링링 브로스 서커스단에 매각되어 ‘링링 브로스와 바넘&베일리 서커스’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계속해나갔다.
바넘은 1865년 코네티컷주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브리지포트의 시장으로 1년간 재임하기도 했다. 노예제에 반대하고 흑인의 참정권을 옹호했다.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서도 자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활용했다. 매사추세츠주 터프츠 대학의 박물관과 박물학부 건물을 짓는 데 오늘날 통화가치로 200만 달러를 쾌척한 것이 그런 예다.
1890년 뇌졸중을 일으키는 등 건강이 나빠지자 1891년 뉴욕의 《이브닝 선》지에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최후의 농담처럼 자신의 부고 기사를 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부고 기사를 읽었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 숨을 거두었다. 바넘은 19세기 말에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자서전을 집필했고 여러 차례 수정본을 냈다. 그 밖에도 『세계의 사기꾼들』(1865), 『투쟁과 승리』(1869), 『돈 버는 기술』(1880) 을 저술했다.
옮긴이 정탄
홍익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 기획과 번역을 하고 있다.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나 작품을 소개할 때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번역서로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 『덩케르크』 『해변에서』 『언데드 백과사전』 『러브크래프트 전집』 『스티븐 킹의 그것』 『펜타 메로네』 『좀비 연대기』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나의 계보
제1장 어린 시절
제2장 가게 점원 시절
제3장 주일학교와 낡은 예배당
제4장 내 고향 사람들의 재치
제5장 복권과 그 밖의 사건들
제6장 사업 시작과 결혼
제7장 조이스 헤스와 비발라
제8장 서커스 순회공연
제9장 아메리카 박물관
제10장 톰 섬과 유럽 순회공연
제11장 제니 린드의 공연
제12장 버펄로 사냥
제13장 금주와 농업
제14장 여러 가지 사업들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