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어떤 일은 단 한 번 일어났다 해도 영원히 계속된다."
―감정의 일생을 쓰는 작가, 전경린 신작 소설
섬세한 문장과 강렬한 묘사로 삶과 사랑의 양면성을 그려내는 작가 전경린의 신작 장편이 출간되었다. 『해변빌라』(자음과모음) 이후 삼 년 만이며, 열두번째 장편소설이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2017년 3월부터 7월까지 넉 달간 연재되었던 작품을 상당 부분 개고해 묶었다. 휘몰아치는 서사나 스펙터클한 사건 없이 한 인물의 유년과 성장, 그 반추를 함께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나를 만들어가고 또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로이 깨달을 수 있다. 전경린 작가의 이번 작품에서 그것은 기억과 관계의 힘, 그리고 그것이 이끈 운명이다. 작가는 이렇게 묻는 듯하다. 누구에게나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그 노스탤지어가 이끄는 곳에 어쩌면, 내가 지나온 과거에 어쩌면 이미, 앞으로의 삶을 결정할 거의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이 소설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얼마나 절실했는지는 안다. 이번 소설을 쓰는 사이에 말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기분이다. (…) 모든 말이 너무 깊고 너무 넓고 너무 높은 순간이 있었다.
―‘작가의 말’에서
“아마도 진짜 이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끝날 것이다.”
―너를 기억하는 나의 이야기.
오로지 내가 너를 기억하는 힘으로 써내려간 우리의 이야기.
“나를 라애라고 부른 사람은 세상에 세 사람 있었다.” 소설의 화자 ‘나애’의 과거를 지배하는 세 사람, 도이, 상, 종려할매다. 가족과 떨어져 ‘병원집’에서 살게 된 어린 시절 나애를 지켜준 사람들이기도 하다. 도이, 상과는 유치원 시절, 그들 사이에 ‘문자도 없던 시절’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진 뒤 아홉 살에 또다른 우연으로 만났다.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우린 거기서 함께했다”고 그 시절을 술회하는 나애. 공고하고 비밀스럽고 무구하고 강렬한 유년의 추억이다. 종려할매는 ‘병원집’의 별채에 기거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인물. 나애의 버팀목이 되어 부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어머니의 자리를 채워주었다.
풍요보다는 결핍이, 꿈보다는 녹록치 않은 현실이 삶을 지배하던 1970년대의 풍경 속 그 추억은 반짝 빛나지만 시간은 흐르고 인생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뜻하지 않게 마주한 불운 모두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상은 폭력을 쓰는 세계로, 도이는 폭력을 당하는 세계로 멀어져갔다. 종려할매와는 작별 인사도 못한 채 헤어져버렸다. 끝내 상은 젊은 나이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도이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외려 비로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언젠가 할말이 있었다. 도이야, 너를 줄곧 생각했다.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사람이 줄곧 그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 이따금 생각한 것이다. 늘 잊고 살다가 문득문득 생각한 것이다. 평생 그럴 것이다.(36쪽)/ 기억한다. 나의 진실은 이것뿐이다. 기억이란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 짧은 영상들, 끊어지는 장면들, 흩어지는 표정들. 그러나 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깊다. 나는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 다만 줄곧 도이를 생각해온 것만 같다.(74쪽)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애가 도이를 떠올리고 생각하는 대목. 따라 읽다보면 그것이 도이를 살게 한 원동력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도이와 상이 나애를 살게 한 것처럼 말이다. “이를테면 도이와 상이라는 축이 없었다면, 나의 유년 세계는 기억으로 구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수많은 나날이 유실되었듯이, 어딘가로 빠져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아무 일도 없이”(73쪽)라는 나애의 말처럼, 우리는 나 하나로 온전히 나일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의 세계는 서로의 기억 속에 살고 기대며 구성된다. 삶을 이어가는 힘이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이다.
2010년대를 사는 현재의 나애에게는 강과 희도가 있다. 십 년을 안정적으로 만나온 강과는 강의 옛 연인 허윤주가 찾아오며 기묘한 삼각관계를 이어가다가―나애는 강과 허윤주 사이의 아이의 대모가 되었다―결별하였다. 희도와는 삼 년을 ‘임시 동거인’처럼 만났다. 나애와 희도는 많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했지만 “둘 사이에는 어느새 최초의 간격으로 돌아가는 탄성이 있었다.”(10쪽) 그런 희도와 나애는 결국 서로를 떠나보내려 하는데…
상실은 두려우면서도 친숙했다. 언젠가 몇 번이고 겪었던 일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잃어버릴 때 안심하는 것일까. 왜 잃어버린 것들이 오히려 더 안전하게 느껴질까. 오히려 더 확고하게 나의 것 같을까. 현실은 여기까지이다. 여기서 끝이 난다. 희도는 떠나지만, 이제 현실의 이름을 지우고 내 안의 세상을 살 차례였다. 나의 안에는 그런 장소가 있다. 한번 일어난 일은 영원히 복기되는 곳,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49쪽)
도이, 상, 종려할매, ‘병원집’의 다른 사람들, 엄마, 그리고 강. 소중한 사람들을 차례로 잃어갔던 나애의 경험과 기억은, 그녀가 품어온 근원적인 고독은, 결국 이렇게 희도 역시 떠나보내는가. 공항의 출국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애의 모습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나애는 어디로 향할까. “때로 어딘지 모를 그 멀고 낯선 여행지는 기억과 망각이 뒤섞인 자신의 가장 안쪽일 수도 있다. 자신의 고독을 받아들이고 침묵할 때 부유하는 여행은 끝나고 삶이 시작된다.”(243쪽)
‘감수성의 작가’ 전경린은 내면 깊은 곳의 감정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 자라는지, 변하는지, 소멸해가는지, 그 감정의 일생을 씀으로써 인간의 가장 여리고 섬세한 특질을 애틋하게 부각한다. 그리고 그 감정이 이끈, 누군가의 삶을 지배하게 된 운명으로 우리를 조용히 안내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밀려오는 저마다의 기억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소중했던 이름들, 나를 소중히 여겼던 이름들을 곱씹어볼 일이다. ‘너를 기억하는 힘으로’라고 되뇌며 그 이름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나를 새삼 돌이켜보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벅차오르는 묘한 감정에 휩싸일 터이다. 그것이 바로 위태롭고 공허한, 때때로 버거운 삶을 감싸안는 전경린식 위무이리라.